오피니언 기고

통계는 ‘신뢰’를 먹고 자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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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의료검사와 측정을 하듯 한 국가나 사회도 여러 가지 통계로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한다. 통계는 수립된 정책이 잘 수행되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도 기본이 된다. 오늘은 ‘제15회 통계의 날’이다. 우리 통계의 역사는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짧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빠른 경제성장으로 오늘의 생활 수준에 이른 데에는 통계가 매우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제 선진국 모퉁이에서 우리의 통계와 통계인들의 역할을 되새겨 보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통계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몇 가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모든 측정은 사용자가 믿고 쓸 수 있도록 만들고 제공되어야 한다. 통계를 받쳐주는 세 개의 기둥이 있다. 우선 원자료인 데이터 제공자, 즉 국민과 기업체가 있다. 다음으로 통계를 생산하는 통계인, 그리고 정부·기업·연구자 등 사용자가 있다. 여기서 통계생산자의 임무는 특히 막중하다. 우선 모두의 ‘믿음’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데이터 제공자가 정직한 원자료를 내주게 된다. 나아가 통계생산이 어느 누구의 압력에 영향을 받거나, 생산자 자신의 편견이 가미되거나,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보여진다면 그런 통계는 없는 것만 못하게 된다. 우리 통계가 실제보다 저평가받는다고 보는 이들은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있다.

필자가 차기 회장으로 일하는 국제통계기구는 이런 우려를 고려해 지난 30여 년간 통계인의 윤리강령을 제정·공표했으며, 통계를 둘러싼 모든 환경변화에 적응하도록 자주 수정해 오고 있다. 요점은 통계생산에 필요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이의 대상인 사람이나 단체·기업에 인도적·물리적·신체적·정신적 피해가 없도록 하고, 그들의 사생활이나 비밀이 보호되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복지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계인은 통계기법이 최고 수준임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투입된 데이터가 목적에 타당한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해가 상충될 때는 중립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통계인의 정직성과 흠집 없는 투명성에서 시작된다. 즉 조직의 상부에서 올 수 있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독립성·객관성·투명성은 여기에 따라오는 부수적 특성이 된다. 유엔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각국 통계생산기관의 의사결정제도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통계생산기관장(長)의 임기가 보장되고 세계적 수준의 통계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선진국에서 통계 불신이란 말은 들어보기 힘들다. 곧 부산에서 제3차 OECD 세계포럼이 열리고 세계적 통계전문가들이 우리를 찾게 된다. 이번 세계포럼이 국내 통계인의 역할에 대한 글로벌적 고민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 통계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도 뒷받침해 주면 좋겠다.

이재창 고려대 명예교수 국제통계기구 차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