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는 ‘샤넬’이 되기 전에 남자를 만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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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4면

전설적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1883∼1971)에 대한 영화라고 한다면 으레 성공 스토리를 주축으로 생애를 훑는 전기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무책임하고 가난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언니와 함께 보육원에 맡겨진 출생 과정, 할머니가 될 때까지 숱한 애인과 염문을 뿌렸던 자유분방함, 아니면 카디건 스타일의 재킷과 무릎 길이 스커트로 유명한 ‘샤넬 슈트’를 만들게 된 사연과 같은 드라마틱한 얘기 말이다.

영화 ‘코코 샤넬’, 감독 안 퐁텐, 주연 오드리 토투·알레산드로 니볼라

27일 개봉한 오드리 토투 주연의 ‘코코 샤넬’은 이런 일반적인 예상을 비껴간다. 샤넬이 되기 전의 코코(Coco avant Chanel)’라는 원제처럼 여성들을 길고 거치장스러운 복장에서 해방시킨 혁신적 패션의 선구자가 되기 ‘이전’의 시절을 조명하는 의외의 선택을 한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코코와 두 남자 이야기다. 한 남자는 오갈 데 없는 술집 가수 코코에게 거처를 제공했고, 다른 하나는 정략결혼을 한 유부남이면서도 코코와 정열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다.

성공에 이르기까지 코코의 굴욕적인 과거는 술집에서 만난 부유한 중년남자 에티엔 발장(보네아 포엘부르드)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설정으로 압축된다. 발장의 요구로 이따금 잠자리를 함께하지만, 언제 쫓겨날지 불안한 신세였던 코코는 번번이 기지(?)를 발휘하며 기묘한 동거를 이어간다.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코코에게 프루동의 철학서를 권하는 이지적인 영국 신사 아서 아서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과의 운명적 만남도 그곳에서 이뤄진다.

패션만큼이나 코코의 사랑법도 혁신적이었다. 보이가 석탄재벌 딸과의 정략결혼을 앞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충격에 몸부림치다 관계를 깨뜨리는 쪽보다는 정부가 되는 편을 택한다.거듭 말하지만 ‘샤넬 제국’ 건설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자서전만 이미 수십 종이 넘게 나와 있는 유명인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더도 덜도 아닌 러브스토리라는 점에 배신감을 느낄 관객도 상당할 것이다.

뭐, 기대수준을 다소 하향 조정한다면 ‘샤넬 스타일’을 못 즐기란 법은 없다. 발장의 옷을 리폼해 만든 승마 바지와 챙 좁은 모자(당시 여성들은 말을 탈 때도 긴 치마를 입었다), 보육원 제복을 연상케 하는 심플한 검은 드레스(자신의 검은 눈동자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화려한 옷감을 마다하고), 어부들의 옷에서 착안한 저지 소재의 머린 룩 티셔츠(애인과 놀러 간 해변에서도 패션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저지는 당시엔 남성 속옷 소재로 주로 쓰였다) 등이 그것이다. 샤넬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의 도움을 받아 샤넬 개인 박물관에서 가져온 의상들은 영화 막바지에 모델들이 입고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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