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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닮았지만 자연이 되지는 못한, 귀부인의 운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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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8면

1 윌리엄 할렛 부부 (아침 산책) (1785), 토머스 게인즈버러 (1727~88) 작, 캔버스에 유채, 236 x 179㎝,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화 ‘공작부인’(2008)은 아름답고 발랄한 처녀가 친구들과 어울려 드넓은 정원의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 장면에서 그녀는 한층 성숙한 아름다움을 풍기며 어린 자식들과 정원의 분수 주변을 뛰어다닌다. 그녀는 명랑하게 웃지만, 처녀 시절의 한 점 그늘 없는 웃음과는 다르다. 그 시작과 끝 장면 사이에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기에. 그래도 정원에 있을 때만큼은 행복하다.(사진 2)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 게인즈버러와 영국식 정원

그녀의 이름은 조지아나 캐번디시(1757~1806),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부인으로 18세기 영국에 살았던 실존인물이다. 이 공작부인은 스펜서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녀의 후손인 다이애나 스펜서, 즉 ‘비운의 왕세자빈’ 다이애나와 여러모로 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사교계의 스타이며 패션 리더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은 점, 그러나 정작 남편의 사랑은 얻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사랑을 추구한 점 등등에서 말이다.

2 영화 ‘공작부인’ (2008)의 한 장면

영화 ‘공작부인’은 이렇게 드라마틱한 조지아나의 삶을 여느 영화처럼 더욱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는 대신 오히려 한결 덤덤하게 펼쳐 보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시대 상류층 여성의 삶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좋기도 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당시 영국 귀부인의 삶은 동시대 조선 사대부 여인의 그것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 커다란 깃털을 머리에 단 새로운 패션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 깃털과 관련된 재치 있는 정치적 농담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천하의 조지아나조차 남편의 계속되는 외도에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고, 공작 지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빨리 낳으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신세인 것이다.

그런 조지아나가 숨통을 틔우는 장소는 다름 아닌 정원이다. 그녀가 어린 딸들이 뛰어 노는 것을 보며 웃을 수 있던 장소도 정원이었고, 연인 찰스 그레이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장소도 또 다른 정원이었다. 그녀는 동시대의 뛰어난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인 토머스 게인즈버러(1727~1788)의 그림 속 여인(사진 1)처럼 깃털과 리본이 멋들어지게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쓰고 엷은 빛깔의 드레스 자락을 부드럽게 사각거리며 정원을 산책한다. 사실 게인즈버러가 실제 조지아나 캐번디시를 그린 초상화가 따로 있지만, 영화 ‘공작부인’ 속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조지아나의 시원스러운 이미지와 패션은 이 할렛 부인의 그림을 더 닮았다.

3 앤드루스 부부(1748~1749), 토머스 게인즈버러 작, 캔버스에 유채, 70 x 119㎝, 내셔널 갤러리, 런던

조지아나가 거니는 정원들은 꽃들이 카펫처럼 무늬를 그리며 심어져 있고 반듯한 생울타리로 구획되어 있는 프랑스식 정원이 아니다. 너른 초록색 잔디밭에 드문드문 우거진 나무들과 잔잔한 호수가 있고, 고풍스러운 다리와 돌담이 여기저기 있으며, 양떼가 풀을 뜯는 목초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영국식 풍경정원(English garden)인 것이다.

영국식 정원은 인공미 가득한 프랑스식 정원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고, 풍경화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시적인 자연풍경에 대한 동경과 장 자크 루소 식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철학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공작부인’의 로케이션 중 한 곳인 채스워스 저택(사진2)은 이런 영국식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인데, 영화 속 조지아나는 그런 정원에서 잠깐 동안 자연으로 돌아가 감정에 충실해지고 순수한 유쾌함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영국식 정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 ‘공작부인’은 그 전체적인 비주얼에 있어서도 게인즈버러의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게인즈버러는 초상화가로 인기가 높았지만 개인적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초상화에 싫증이 난 나머지 악기 하나 둘러메고 풍경화만 그릴 수 있는 전원 마을로 떠나고 싶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밀려드는 초상화 주문에 부응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풍경화도 그리기 위해 정원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를 많이 그리곤 했다.

이렇게 게인즈버러가 초상화와 풍경화를 결합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유명한 ‘앤드루스 부부’(사진 3)다. 이들은 갓 결혼한 젊은 부부였고, 이 그림은 이들의 결혼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참나무 아래 의자에 푸른 새틴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앤드루스 부인과 사냥 복장에 엽총을 들고 자랑스럽게 서 있는 앤드루스 옆으로 추수가 끝난 밀밭이 이어져 있고 저 멀리 양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정경이다.

그런데 이 앤드루스 부부도 그렇고, 앞서 그림 속의 할렛 부부도 그렇고, 아름다운 전원 속 젊은 부부들이 왜 이렇게 딱딱한 표정인 것일까. 이것은 당시에 상류층을 그리는 관습에 따른 것으로서 그림을 보는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고 품격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에 대한 동경을 담은 영국식 정원 안에서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지위와 격식에 얽매여 있는 셈이다.

하긴 정원이란 것 자체도 자연 그대로가 아니며 소유자의 지위와 부를 반영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앤드루스 부부의 딱딱한 표정을 가리키며 “이런 그림들은 루소가 주장했던 자연과 거리가 있다. 그들은 토지 소유자들이고 그들의 소유자로서의 태도는 자세와 표정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 시니컬하게 말하기도 했다.

정원 장면에서 시작해 정원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 ‘공작부인’의 조지아나 역시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고 자식들을 위해 남편의 곁에 머무르는 쪽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수동적인 삶에 안주하지는 않고 여전히 활발한 정치와 사교계 활동을 했지만 말이다. 정원은 자연의 동경이지만 자연 그 자체는 아니기에.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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