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과학자에게 자유를 줘라, 그리고 기다려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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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20면

“과학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젊은 과학자에게 자유를 주라.”
노벨 화학상 수상자 2명이 한국에 건넨 충고다. 1986년과 91년 각각 노벨 화학상을 받은 하버드대 더들리 허슈바크와 제임스 코리 박사는 26일(현지시간) 하버드대 화학과 연구실에서 서울대 이장무 총장을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이들은 현재 은퇴했지만 무보수로 여전히 강의와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허슈바크 박사는 “위대한 과학적 진보는 박사학위를 받기 전후의 젊은 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이들이 독창적인 자기 아이디어에 천착할 수 있게 해줘야 노벨상도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코리 박사는 “많은 대학이 수준 높은 연구에만 투자하길 원하지만 세계 각국 학자와 교류하자면 언어 교육부터 해야 한다”며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이 총장과 두 과학자의 대담 내용.

노벨화학상 수상자 하버드대 더들리 허슈바크, 제임스 코리 박사의 조언

▶이 총장=한국은 선진국이 먼저 개발한 기술을 응용하는 데선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초과학에선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떻게 해야 하나.

▶허슈바크=하버드엔 1933년 로런스 로어 총장의 기부에 의해 만들어진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라는 장학 프로그램이 있다. 매년 박사학위를 받기 전후의 젊은 과학자 8명을 뽑아 3년 동안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지원해 주는 제도다. 원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아이작 뉴턴 시절 도입했던 걸 배워온 거다. 오늘날 하버드가 낸 수많은 과학적 업적은 이 장학제도 덕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과학자에게 자유와 재량권을 주라. 거기에 과학의 미래가 있다. 아쉽게도 미국 대학 역시 과거의 전통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교수가 투자금을 따오는 데 급급하다. 그래야 거느리고 있는 대학원생을 먹여살릴 수 있어서다. 이러다 보니 젊은 학자들이 지도교수의 하청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래선 독창적이고 위대한 연구가 나올 수 없다.

서울대 이장무 총장

▶코리=거창한 연구에 앞서 가장 기초적인 준비부터 해야 한다. 지금은 세계 여러 국가 학자와 교류하지 않고선 연구 자체를 진행하기 어렵다. 그러자면 언어가 가장 기초다. 그러나 많은 대학이 언어교육에 소홀하다. 지금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니 영어에 익숙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총장=될성부른 젊은 학자를 발굴해내는 건 어느 대학이나 까다로운 숙제다.

▶허슈바크=정말 어려운 문제다. 예컨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케네스 윌슨 코넬대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8년 동안 단 한 건의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학교 안팎에서 비판이 쏟아진 건 당연했다. 그러나 코넬의 원로 물리학교수는 그를 믿었다. 이후 윌슨이 발표한 논문은 물리학의 지평을 바꿔놓았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겼다. 발표 논문 수나 인용 건수보다도 원로 교수의 선구안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일류는 일류를 뽑고 이류는 삼류를 뽑는 법이다.

▶코리=메이저리그 야구팀을 보라. 챔피언 팀엔 최고의 선수가 모인다. 하버드 화학과엔 한때 교수의 3분의 1이 노벨상 수상자였다. 과학에서 구색 맞추기 인사는 의미가 없다. 최고의 엘리트를 모으라.

▶이 총장=과학의 발전엔 특히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허슈바크=전적으로 동감이다. 미국이 건국 초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해서다. 예컨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물리학의 대가였다. 심지어 유럽의 물리학자들이 아이작 뉴턴의 이론에 대해 제퍼슨에게 자문할 정도였다. 제퍼슨이 개량한 쟁기는 이후 수백 만 농민이 이용했으나 그는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과학은 모든 사람의 공유물이란 생각에서다.

▶이 총장=지금 한국 지식계의 화두는 지식의 융합, 통섭이다. 학문의 벽은 물론 국경도 건너뛰는 소통을 강조한다. 서울대도 경기도 시흥에 국제캠퍼스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곳에 의학자와 과학자가 만나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선 전통적인 학제의 틀을 허무는 건 섣부른 시도라는 비판도 있다.

▶허슈바크=미국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대표적인 게 미국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 설립된 샌타페이연구소다. 이곳에선 과학자뿐 아니라 인문학자·사회학자와 예술가까지 참여해 서로 교류한다. 미국 학계도 이들의 시도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다만 이런 변화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단번에 모든 걸 이루려 해선 곤란하다.

▶코리=차세대에 가장 중요한 분야는 의료다. 의학자와 과학자를 교류하게 해야 한다. 하버드도 의대와 대학이 떨어져 있다. 물리적으로 서로 가까워야 한다. 5분 거리도 멀다. 서울대도 의사와 과학자가 스킨십을 나누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다만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하기보다 작은 규모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 총장=과학도를 꿈꾸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허슈바크=많은 사람이 과학에 대해 세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첫째, 과학은 어렵다는 거다. 얼른 보면 그렇지만 과학은 시행착오를 허용한다는 면에선 사회과학보다 오히려 쉽다. 실패해도 계속 실험을 하면 반드시 성과를 준다. 자연은 거짓말을 안 한다. 둘째, 과학자는 외골수라는 편견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험실이야말로 사회성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다. 셋째, 과학자는 수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능통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첼리스트 요요마는 노래를 못한다고 하더라. 과학자도 똑같다. 수학을 다 잘할 필요도 없다. 과학은 즐기는 학문이다.

▶코리=과학자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단번에 세계적인 연구를 성공시킬 수는 없다. 복잡한 문제는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 한 번에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더들리 허슈바크
86년 리위안저(李遠哲)·존 폴라니와 함께 ‘교차 분자빔 기술’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는 화학반응 중 일어나는 분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한 기술이다. 화학에서 시작해 물리학과 생물학에 이어 과학사까지 섭렵했다.

제임스 코리
90년 복잡하게 합성된 분자의 구성요소를 거꾸로 해체해내는 기술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기술 덕에 자연에서만 얻던 100여 종의 화학물질을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됐다. 대표적인 게 천식 치료제 징코라이드B다. 이는 은행나무에서만 추출할 수 있었으나 인공 합성이 가능해지면서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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