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검사 연판장' 본질 바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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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선 소장 검사들 사이에 검찰 수뇌부의 퇴진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 보장 등을 요구하는 연판장.건의문을 작성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울지검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같은 움직임은 인천과 부산으로 번지더니 하루만에 전국 각 지검.지청 단위까지 확산되고 있다.

검사들의 집단 행동은 검찰 사상 초유의 일로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태다.

국가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할 검사들이 조직적으로 상부에 반발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지난 71년과 88년 두 차례에 걸쳐 법관들의 집단행동에 의한 사법파동이 있었지만 상명하복 (上命下服) 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검사들의 집단 행동은 판사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보면 검사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대전 법조비리 사건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미 예견할 수도 있었다.

심재륜 (沈在淪) 대구고검장 사건 직후 우리는 대전 법조비리 사건의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제2, 제3의 파동을 걱정했었는데 결국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직접 불씨는 대전 사건의 원칙없는 처리에 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뚜렷한 기준도 제시하지 못한 채 마녀 사냥식으로 단죄하려 했다고 검사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증거도 확인 절차도 없이 피의자인 이종기 (李宗基) 변호사의 말 한마디가 검찰 고위 간부들의 생사를 좌우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검찰권 독립을 둘러싸고 누적돼 온 검사들의 불만으로 볼 수 있다.

검사들의 연판장과 건의문은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퇴진과 함께 '검찰 조직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내부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검사들이 '이번 기회에 일부 정치적인 검사들도 사퇴해야 한다' 고 주장해 검찰내에 정치 검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우리 검찰이 '정치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 사건 때마다 지적받아 온 일이다.

또 沈고검장의 지적처럼 '그동안 검찰 수뇌부가 권력만을 바라보고 권력의 입맛대로 사건을 처리했으며 심지어 권력이 먼저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권력의 뜻을 파악해 시녀가 되기를 자처했다' 는 비난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권 독립은 이번 사태의 요체고 본질이다.

특히 이같은 목소리가 검찰 내부에서 터져나온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현 검찰 수뇌부는 부하들에게 불신임당한 셈이고 정치 권력에 빌붙어 요직을 차지해 온 검찰 간부들에게는 경종이고 경고인 것이다.

물론 검찰권 독립에는 정치 권력의 의지가 절대적이다.

검찰을 집권층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여망을 알면서도 과거 어느 정권도 실행하지 못했던 난제 (難題) 중의 난제다.

법무부가 서둘러 법조비리 근절대책과 검찰 개혁 방안을 발표했지만 이같은 미온적인 대응으로 이번 사태가 해결되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검찰 수뇌부와 정치권이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고 검찰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될 용단을 내리는 것만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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