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사형수 살렸다…50대 흉악범 처형직전 감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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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제 떠날 날이 2주일 정도 남았네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타일러 변호사님. "

"미즈씨, 오늘 좋은 소식을 들은 게 없었나요. "

"전혀요. "

"하나 드릴게요. 주지사가 드디어 감형조치를 내렸어요. 교황께서 주지사에게 직접 청원했답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

처형 직전에 있던 미국의 한 사형수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살려냈다.

저승 문턱에서 되돌아온 이 사형수는 데럴 미즈 (52) 로 흉악한 살인범. 88년 마약제조를 함께 했던 동업자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69세의 노인과 그의 부인, 장애인이었던 손자를 산탄총으로 무참히 살해했다.

그는 2년여 도피생활끝에 90년 경찰에 붙잡혔고 곧바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미주리주는 사형제도가 매우 엄격한 곳이다.

교황이 경찰 살해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글래넌 스위트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형을 요청했으나 주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곤 지난해 4월 스위트에 대한 사형집행을 강행했다.

여러차례 감형청원을 내온 미즈도 스위트의 사형집행 소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모들을 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다시피 했다는 그는 포토시 교도소에서 10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주일도 빼먹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스위트의 사형집행 후에도 그의 신앙심에는 변화가 없었다.게다가 그는 "나의 변호사는 하느님" 이라며 "그분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형을 달게 받아들이겠다" 고 담담한 심정을 피력했다.

지난해 11월 법원은 그의 사형일자를 올 1월 26일로 정했으나 4일후 아무런 설명없이 2월 10일로 변경했다.

교황방문과 겹친데 따른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 그에게 닥쳐왔다.

그러나 교황의 세인트루이스 방문은 그의 인생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가 맨처음 처형당하기로 예정됐던 지난 1월 26일 세인트루이스시를 방문한 교황이 미주리주의 멜 캐너헌 (64) 주지사에게 미즈의 선처를 간곡히 부탁한 것. 교황은 이날 세인트루이스의 트랜스 월드돔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사형제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강연이 끝난 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캐너헌 지사에게 교황이 갑자기 다가왔다.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띤 교황은 그의 손을 잡은 채 상체를 굽혀 나직이 속삭였다.

"미스터 미즈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 주청사로 돌아온 그는 부인과 만나 상의했으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혼자 서재에 들어간 그는 몇시간을 고민하다가 오후 9시쯤 부인을 불러 나직이 말했다.

"난 결심했소. " 민주당 소속으로 93년 주지사에 처음 당선돼 재선을 누리고 있는 그는 그동안 모두 26건의 사형집행에 대해 사인을 한 강경한 사형찬성론자였다.

그는 개신교인 남부침례교 신자로 가톨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전세계 10억 가톨릭교도의 지도자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그런 청원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지사는 앞으로도 사형제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의 간곡한 청원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신의 뜻을 따르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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