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의 47년 동행 … 그녀는 DJ의 ‘정치 참모’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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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DJ·左) 전 대통령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TV에 비쳐진 부인 이희호右 여사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쓰러질 듯 오열하는 슬픔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남편의 유지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연설을 한 강인함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는 얘기가 나왔다.

DJ의 오랜 측근들은 “이 두 장면이 이 여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며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성민 전 의원은 “평소엔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절제형이지만,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거나 자신이 나서야 하는 대목에선 의연하게 행동하는 강직한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장례기간 중 일부 참모가 “나로호 발사를 연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냈다가 이 여사로부터 쓴소리를 들은 일이나, “노제를 강행하자”는 의견을 그가 잠재운 것도 이런 맥락이란 얘기다.

생애 47년을 DJ와 함께해온 이 여사는 DJ의 동반자이자 최고의 정치 참모였다. 측근들은 “한국 정치의 거목으로 DJ를 단련시키고 성장케 한 사람은 바로 이 여사”라고 입을 모은다. 예춘호 전 의원은 “남편의 의견을 단순히 대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한 사람의 정치인이었다”(이희호, 『나의 사랑 나의 조국』)고 회고했다. 동교동계 출신인 김방림 전 의원은 “DJ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훨씬 이전인 1960년대부터 이 여사는 여성계 행사나 외신기자회견 등에서 DJ를 ‘대통령 후보감으로 키워 달라’고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흔한 일이지만 71년 당시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란 이름을 써 풍선을 달아 띄우는 선거운동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도 이 여사였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62년)했다. 당시 이 여사는 미국 유학(스캐릿대 사회학 석사)에서 돌아와 YWCA 총무를 맡고 있었던 ‘신여성’이었다. 반면 DJ는 전처 소생 둘을 둔, 무명의 정치 지망생이었던 때문이다. 이 여사는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야심에 찬 사람이니 내가 도우면 큰 지도자가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DJ가 가택연금·투옥·망명생활 등으로 시련을 겪을 때 그를 민주투사로 거듭나게 한 데도 이 여사의 역할이 컸다. 특히 ‘독서 내조’는 유명하다. 감옥에 있는 남편을 위해 그는 신간은 물론 역사·신학·철학·정치·문학 등 각 분야의 책들을 미리 읽고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내용을 요약해 참고서적과 함께 보냈다. 책에 대한 평이나 느낌 등도 깨알 같은 글씨로 엽서에 적어 보냈다. DJ도 생전에 “감옥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읽고 싶을 땐 다시 감옥에라도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DJ가 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일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썼다. 편지엔 “책을 읽는 도중 간간이 하늘을 쳐다봐야 눈을 버리지 않는다”거나 “(교도소 내) 수퍼에서 파는 통조림·밑반찬 종류를 모두 사다 먹어봤는데 OOO이 좀 나은 것 같으니 사서 드시라” “예수님은 환난의 시기, 암흑의 벽을 뚫고 삶과 희망을 갖고 오셨다”는 등의 구절이 담겨 있다 .

그는 ‘인생의 반쪽’(DJ)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병상을 지킨 37일 동안 하루도 남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문병객을 맞는 일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기도와 뜨개질로 보냈다는 게 비서들의 얘기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한 비서는 “ 80년대 초 이후 뜨개질을 하지 않아 ‘방법이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서너 시간 만에 장갑을 다 떴다. 그 모습이 너무 간절해 지켜보는 사람이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MP3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성경 강독을 늘 틀어놨다고 한다.

DJ 서거 후 이 여사는 한 측근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결혼 이후 진정한 사랑과 부부애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며 산 기간은 대통령 퇴임 이후 지난 7년간이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또 “잠들기 전 남편과 나란히 침대에 앉아 두 손을 맞잡고 나라가 잘되기를 기도했고, (애창곡인) ‘만남’ ‘목포의 눈물’ 등을 함께 부르곤 했다”며 “평생 해보지 못한 일들을 지난 7년 동안 많이 해봤다”고 DJ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을 회고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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