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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 김기협씨 거북선 자료발굴 의미 진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지난해 12월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4백주년을 기해 이종학씨 (독도박물관장)가 공개한 거북선 관련 자료 (본지 98년 12월22일자 1, 40면) 는 거북선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으며 현재 전문가들이 정밀한 분석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에 이번 자료를 일차적으로 검토한 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을 게재한다. 향후에 거북선 연구가 김재근박사, 거북선 제작에 평생을 바쳐온 이원식씨,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 최두환 중령 등이 분석을 마치는대로 그 결과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번 발굴된 자료 중 거북선의 인수인계 문서인 '귀선중기 (龜船重記)' 를 보면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 길이도 정조 때보다 크게 짧지 않은 60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백54명의 신상명세를 담은 문서는 승선자의 부서별 명단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8쌍의 노가 적혀있다.

이 자료는 판옥선의 선원명단인지 거북선의 선원명단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당시 거북선이 판옥선을 바로 변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양자의 노 수도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60자의 바닥판 길이면 8쌍의 노를 배치하기에 적당한 크기다.

김재근 (金在瑾) 박사가 수십년의 노심초사로도 풀지 못하던 이 문제를 일거에 명확히 만들어준 데서 이번 발굴자료의 가치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연구가치를 가진 측면으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두 종류의 명단으로 당시 수군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자목록을 통해 당시 화포기술의 실제를 밝히는 것이다. 이중 한 명단에는 1백54명의 이름이 남아있지만 말미에는 모두 3백4명이라고 적혀있다.

당시의 판옥선과 거북선 승선인원이 1백30~1백40명으로 추정되는 만큼 3백4명이라고 하는 것은 판옥선 두 척 (한 척은 거북선일 수도 있음) 과 사후선 (伺侯船) 두 척으로 구성된 선단 (船團) 의 정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 하나에 8~9명 노꾼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석연치 않다. 좌변의 노와 우변의 노를 구분해 노의 번호를 1에서 8까지 붙여놓으면서 두 배의 같은 위치의 노에 붙을 노꾼을 묶어서 표시한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래 연구자들의 해명을 기다릴 일이다.

병사들 용모의 특징을 적어놓은 기록에 한결같이 "키 네 자, 쇠빛 얼굴색, 흠집 없음" 으로 표시된 것은 전쟁 통이라서 서류가 무성의하게 작성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형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이 관례였는지 궁금하다.

아비 이름 (父名) 의 절반 가까이가 '부지' (夫支) 로 돼있는 것과 상당수의 거주지가 '고성 (固城) 영하 (營下)' 로 돼있는 것 역시 신원파악이 허술한 느낌을 준다.

또 하나의 명단은 훨씬 단순한 내용으로, 두 명의 정군 (正軍) 과 한 명의 보원 (保員) 이 조를 이루고 있다. 군역을 직접 치르지 않는 대신 두 명 정군의 뒷바라지를 맡는 보원제도 운영을 위한 명부로 보인다.

세필 (細筆) 로 적힌 물자목록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윤곽을 파악하기에 힘이 들지만 군사기술 전문가에게는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술사의 현장자료가 귀한 데 비추어 백여 종 물자의 수량을 적은 이 자료는 큰 잠재적 연구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발굴된 자료는 기존의 큰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있다. 역사 연구에 직접자료의 힘은 막대하다.

어느 집 벽지로 붙어있다가 빛을 보게 된 4백년 전의 이 자료를 보며, 자료의 발굴은 발굴하는 힘에도 적지않게 달려있음을 실감한다. 인멸되기 전에 건져내야 할 자료들은 아직도 곳곳에 널려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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