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박정희의 10·26과 DJ의 8·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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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우연의 일치인가. 거목은 쓰러지는 날짜도 범상치 않은 것 같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피살됐다. 10·26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날이다. 이토가 누구인가. 일본 ‘근대화 정권(메이지 정부)’의 중추적 인물이다. 총리대신만 네 번을 지냈고 초대 조선통감을 맡아 조선병탄(倂呑)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일본은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을 정도다. 안중근은 이런 인물을 죽임으로써 세계를 향해 조선의 마지막 비명을 질러보려고 했다. 이토 암살 10개월 후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안중근의 총성은 조선을 위한 조총(弔銃) 발사였던 셈이다.

자신이 택한 건 아니지만 박정희의 사망일이 이날이 된 것도 뭔가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닐까. 박정희는 비록 자신이 독재를 했지만 남미 같은 사욕(私慾)형 독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개발독재였다고 말하고 싶었을 게다. 개발독재는 성공해 경제가 발전했고 중산층으로 성장한 시민들이 이제는 민주화를 요구하니 자신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게다. 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괜찮아”였다. 국가는 박정희를 국장으로 보냈다.

DJ는 2009년 8월 18일에 서거했다. 이날은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33주년이다. 76년 그날 북한군은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했다. 미국 대통령 후보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분위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53년 휴전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됐다. 김일성은 북한군에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한국 해역에 항진시키고 B-52 폭격기를 띄웠다. 한·미 양국은 북한이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도발하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은 도발할 수 없었고 김일성은 휴전 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유엔군에 유감을 표명하는 굴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DJ는 53년 휴전 이래 반세기 동안 북한에 대해 가장 화해적인 남한 지도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남북화해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2000년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를 만난 남한 대통령이 되었다. 남북관계에서 여러 곡절이 많지만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DJ 대북정책의 현실적인 증거물로 남아있다. 대북화해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지도자가 한반도에서 가장 전쟁의 위험이 높았던 날에 사망한 것은 무슨 뜻일까. 물론 그저 그렇게 생긴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안중근 의거일에 죽은 것처럼 DJ가 이날 사망한 것은 통일로 가는 길에 뭔가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신은 증오의 기념일에 맞춰 남북화해의 기수를 하늘로 불러들임으로써 서로 등이 붙어있는 ‘전쟁과 평화’를 말하려 한 건 아닐까. 평화를 위해선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되고, 전쟁을 결심할 정도가 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 말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