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조화’ 들고 온 북 조문단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 안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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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보낸 조화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 셋째 사람이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 조화는 김일성화(자줏빛)·김정일화(붉은빛)가 섞여있는 형태이며 리본에는 직함 없이 단지 ‘김정일’이라는 이름만 적었다. [뉴시스]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북한 조문단의 행보는 예상보다 차분했다. 공개 석상에서의 대남 비난 등 돌출 행동 없이 조의 표명에 집중했다.

철통 보안 속에 김포공항을 빠져나온 조문단은 곧장 여의도 국회의사당 빈소를 찾았다. 조문단은 정부 차량이 아닌 ‘허’자 번호판을 단 렌터카를 이용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화를 앞세운 이들은 남측의 안내에 따라 헌화와 분향 등 절차를 밟았다. 유족들을 위로한 김 비서는 곁에 있던 정세균 민주당 대표, 정동영 의원(무소속) 등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김 비서는 방명록에 “정의와 량심(양심)을 지켜 민족 앞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특사조의방문단 김기남”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서울 방문 소감을 묻자 “좋습니다”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김형오 국회의장· 여야 의원들과 환담했다. 김 의장은 “남북의 장래를 위해 지금 연안호가 내려오지 못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좋은 지시를 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문단은 동교동 김대중도서관 5층에서 이희호 여사와도 25분간 만났다. 김 비서는 두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김 위원장의 조전 등을 읽은 뒤 원본을 전달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께서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만큼 유가족이 잘 이어나가시길 바란다”며 “장군님이 ‘먼저 가서 직접 애도의 뜻을 표해야 하며 사절단의 급도 높여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여사는 “먼 길까지 조문단을 보내줘 감사하다”고 했다.

조문단은 오후 6시쯤 숙소인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정세현 부이사장 등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들과 만찬을 했다. 만찬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기자와 만나 “만찬장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자는 얘기가 많이 오갔다”(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중대하게 미션(임무)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문정인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공항과 숙소 주변에선 일부 보수 단체들이 조문단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빈소에서는 일부 조문객들이 김 비서 일행을 박수와 환호로 맞는 등 분위기가 엇갈렸다.

◆김일성화·김정일화 어우러진 조화= 북한 조문단이 가져온 화환은 지름 1m 정도의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다. 백합류의 흰색 꽃을 배경으로 가운데는 붉은 달리아와 유사한 김정일화와 자줏빛 서양란 꽃 모양의 김일성화가 어우러지게 구성됐다.

투명하게 비치는 천으로 된 검정 리본엔 ‘고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라는 글귀와 함께 ‘김정일’이란 이름만 적혀 있었다. 국방위원장 같은 직함은 없었다. 정부와 장의위 측은 빈소에 비치된 ‘김정일 화환’의 관리에 부심하고 있다. 자칫 반북·보수단체 등이 망가뜨릴 경우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정용수·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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