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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신(新) 예송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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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나이는 다섯 살이나 젊지만 자의대비는 엄연히 효종의 어머니(계모)였다. 그녀는 법적 아들인 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 하는가. 이것이 조선을 뒤흔든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의 발단이었다. 서인 송시열, 남인 윤휴를 비롯한 당대 최고 이론가들이 치열하게 법리논쟁·사상투쟁을 벌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다(장남은 왕이 되지 못한 소현세자). 왕위를 이은 것을 중시하면 옛 중국예법에 따라 자의대비도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차남이라는 점을 중시하면 1년 만 입어도 된다. 송시열은 1년, 윤휴는 3년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임기응변으로 경국대전을 빌려와 1년 복상(服喪)으로 낙착되었다.

15년 뒤, 만 50세의 자의대비는 또 풍파에 휘말린다. 효종비이자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 장씨가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보다 여섯 살 젊은 자의대비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살던 왕비였다. 예법에는 시어머니는 맏며느리가 죽으면 1년복을 입고, 둘째 며느리가 죽으면 9개월복(대공복)을 입게 돼 있다. 자의대비는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가.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의 시작이었다. 옛 중국예법에 따르면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효종이 죽었을 때 1년복을 입었던 전례와 충돌한다. 경국대전과 옛 예법을 번갈아 적용하다 보니 모순이 생긴 것이다. 서인은 모순을 피하고자 9개월복을, 남인은 1년복을 각각 주장했다. 현종 임금은 분노했다. “이제 보니 서인들이 우리 아버지(효종)를 왕 아닌 일개 가문의 둘째 아들로 취급했었구나!” 정가에 폭풍이 불어닥쳤다.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오랜만에 집권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두 차례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남인과 그 후예들은 돌이킬 수 없는 반목의 길로 접어들었다.

300년도 더 된 뻔한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예송논쟁은 비록 민생과 동떨어졌다는 약점이 있지만 조선시대 왕권과 신권, 왕과 사대부의 입지를 놓고 다툰 일대 ‘논리 전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장례방식을 두고 정부와 유족 측간에 만 하루 이상 협의가 진행됐다. ‘6일간 국장, 국립서울현충원’이라는 최종 방안에 나는 찬성한다. 그리고, 차제에 정부와 사회 각계가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예우할지 지금부터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본다. 매뉴얼의 핵심 정신은 화해·화합·소통이다. 되도록이면 전직의 과(過)보다는 공(功)을 앞세우길 간곡히 희망한다.

우리는 올해에만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냈고 지금 세 명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전직이 계속 배출될 것이다. 이번처럼 일이 닥치고 나서야 느닷없는 예송(禮訟)논쟁이 벌어지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적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각자의 호오(好惡)가 구체적으로 정리되고, 절충과 수렴의 길도 보일 것이다. 송시열은 자의대비 사망 1년 후 남인들에 의해 사사(賜死)됐고, 남인 윤휴도 서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독배를 마셔야 했다. 어떤 형태라도 조선시대의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마침 우리는 김 전 대통령의 병실과 빈소에서 몇몇 악연(惡緣)들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게 김 전 대통령의 뜻일 것이라고 믿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