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우리를 놀라게 한 다섯곳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98년도 다 저물고 있다.

며칠 후면 매스컴은 올해의 10대뉴스를 꼽기에 분주할 것이다.

그러면서 올해는 정말 다사다난한 한해였다고 회고할 것이다.

그런데 기억에 남을 만한 뉴스가 꼭 '사건' 이라야 할까. 또 꼭 '열가지' 가 돼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령 '올 한햇동안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장소 다섯군데를 꼽는다' 하면 어떨까. 어디 꼽아 보자. 우선 여의도 서쪽 끝에 있는 국회의사당이 첫번째다.

왜? 모든 국민이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를 맞아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곳만은 대충 놀고 먹어도 아무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딴 곳이었다면,가령 가정이었다면 일찌감치 파산했을 것이고 직장이었다면 초장에 직장폐쇄를 당했을 것이다.

여기선 정쟁이다 파행 (跛行) 이다 하면 무위도식 (無爲徒食) 도 합리화된다.

의원들은 세비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은 물론 국고에서 거액의 지원금을 타내고도 더 내라고 납세자를 닦달했다.

그러고도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옛날 공자님은 나라가 평안할 때 아무 일도 못하고 녹 (祿) 만 타먹는 일, 나라에 위기가 닥쳤는데도 아무 업적을 못 세우고 역시 녹만 타먹는 일이 바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여의도 분들, 공자 말씀 너무 무시하면 안돼요. )

국회 의사당의 무위도식이 새삼스런 일이 아닌데 무얼 그리 놀라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다음 장소에 대해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안국동 쪽으로 가다 왼쪽에 있는 불교 조계사 (曹溪寺) 말이다.

여기선 스님들이 몇차례 육탄전을 벌였는데 나중엔 돌멩이와 각목까지 난무했다.

두루마기 입고 헬멧 쓴 승군 (僧軍) 이 공방전 끝에 결국 대웅전에 불을 냈다.

총무원을 차지한 측과 다시 빼앗으려는 측의 대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어허, 무량광대한 정신세계를 천착하는 분들에게 종권 (宗權) 은 무어고 총무원장은 또 무슨 ×막대기인가.

(스님들, 오염과 무명에서 벗어나라는 부처님 말씀, 너무 무시하면 안돼요. )

스님들의 쌈박질도 가끔 있어 온 일인데 무얼 그리 놀라느냐고?

그러나 다음 장소를 들으면 정말 수긍이 갈 것이다.

서울 강남의 서초동 향나무 네거리에 있는 검찰청이 바로 그곳. 이곳에선 1년내내 사정을 했는데 YS의 초강력 사정보다 더 세다.

특히 간헐적으로, 또 교대로 진행된 총풍 (銃風) 과 세풍 (稅風) 조사는 스릴 (thrill) 과 서스펜스 (suspense) 를 자아냈다.

그래서 '잠든 총풍 다시 보고 꺼진 세풍 믿지 말자'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스릴은 몸을 오싹하게 하는 흥분이고, 서스펜스는 불확실에서 오는 긴장이다.

이곳을 들락거린 명사들은 대개 영어 (囹圄) 의 몸이 됐다.

이들을 보고 읊은 시조가 바로 까마귀의 노래다.

먼저 스릴을 느낀 쪽이 혀를 차며 부른 노래.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창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다음 서스펜스를 느낀 쪽이 화를 내며 부른 노래.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어허 그것 참…. ) 검찰청의 사정이 어디 한두해 된 얘기냐고 핀잔을 준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다음 장소를 들으면 정말 경악할 것이다.

바로 판문점이다.

소떼가 넘어가서가 아니다.

남북 공동경비구역의 젊은 사병들이 북한군측과 자주 술잔을 나누다가 이내 포섭되고 내통하고 그것을 막으려는 소대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의혹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소대장 사망을 조사한 군 당국조차 서둘러 자살로 덮어버린 것 같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 내 열린 입을 다물게 해다오. (놀라게 한 장소가 한군데 남았지만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 꼽읍시다.

더 이상 놀라기가 무섭소이다. )

김성호(객원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