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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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그동안 변씨가 냉동창고에 보관한 상주둥시는 모두 천 상자였다.

보관 중에 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창고지기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주문진에 상주할 필요는 있었다.

장마당으로 떠돌아다니기에도 진력이 났고, 아내를 찾는다는 것도 허울뿐 이렇다 할 성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언제 찾아낼 수 있을지 기약도,가망도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객지로 나서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변씨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생각이었다.

창고를 지키면서 겨울장사에 성가가 있는 생선 품목을 싼 값에 매수하는 일도 장마당에 나가 매상을 올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몫이란 인식도 자리잡았다.

그래서 주문진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째가 되는 그의 일과는 새벽 해장국으로 창자를 추스른 다음, 허겁지겁 장마당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늦은 아침을 먹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언덕 위의 집을 떠나 냉동창고로 향하는 것이었다.

만의 하나 지난 밤에 화재라도 입어 건물이 싹쓸이를 당하지 않았나 돌아보고 난 뒤 경비실로 가서 한동안 노닥거리는 것이었다.

삼교대를 하는 젊은 경비원들은 변씨를 물주라 해서 나타날 때마다 깍듯이 대접해 주었다.

경비실에는 연탄으로 구들을 데우는 문은 없고 턱만 있는 방이 있었다.

점심 때가 되면 그 구들에서 자장면내기 고스톱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변씨도 그 화투판에 끼어들어 일부러 몇 천원씩 잃어 주곤 하였다.

그것이 그를 깍듯이 대접해 주는 젊은이들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주의 입장이 된 뒤부터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느긋해졌다.

경비실에서 오전 해를 그럭저럭 보낸 뒤에는 포구 근처로 나가서 계절이 바뀌면서 새로 잡히는 어종과 시세들을 귀동냥하는 것이었다.

포구를 벗어나선 시내 한가운데 있는 해돋이다방으로 향했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그 다방에 차마담이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그마한 여행가방 한 개를 들고 안동을 떠나 주문진에 당도했던 그녀는 떠돌이답게 이튿날로 해돋이다방에 자리잡았다.

그가 다방에 들어서면, 차마담은 그때마다 녹차의 탁월한 효능을 지루하게 늘어놓은 뒤 녹차를 권하는 것이었다.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차마담이 워낙 지성껏 권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녹차로 바꾸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요사이 변씨를 선생님으로 부르지 않고 선장님으로 불렀다.

그 또한 민망할 때가 있었지만, 차마담을 면박할 수 없었다.

그녀와 동행으로 주문진에 도착했던 날은 창고에 짐을 하역시킨 뒤 형식에겐 연락도 않고 진부령 민박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었다.

잠자리에서 그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은 변씨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 숨어서 묶여 버린 듯한 성기능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체위를 수없이 바꿔 보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차마담은 포기하려는 기색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잠재되어 버린 그것을 맹쾌하게 이끌어 내겠다는 결의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연에 대한 우연과 그 우연도 소중한 것이란 것을 일깨워 주는 여자였다.

그래서 변씨는 차마담만 바라보고 있으면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해가 설핏할 즈음에 다방을 나와 영동식당 부근으로 발길을 옮겼다.

친숙하게 지내던 어부들을 만나면, 식당으로 들어가 식은 창자를 소주로 데우며 묵호댁의 가게 꾸려나가는 제도를 눈여겨보았다.

가슴속이 느긋해지면서 지난날처럼 장황설도 늘어놓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묵호댁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그녀도 내심으로는 봉환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지만 겉으로 보기엔 가게를 기백있게 꾸려 나가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아침 나절에는 선착장 횟집 난전으로 나가 파출부 노릇으로 푼 전을 벌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처럼 옆도 돌아보지 않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여자였다.

그렇게 살고 있는 묵호댁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으면 자꾸만 봉환이 모습이 떠올랐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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