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워스의 88승, 프로골프 통산 최다승의 주인공은 여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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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호 22면

베이브 자하리아스
LPGA 투어 59년 역사를 수놓은 역대 스타들. 왼쪽부터 낸시 로페즈, 카리 웹, 안니카 소렌스탐, 로레나 오초아, 신지애. 위의 그림은 선수들의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중앙포토]

LPGA투어는 창립 첫해인 1950년 14개 대회(전체 총상금 5만 달러)를 치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첫 대회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탬파 오픈으로 우승자는 아마추어였던 폴리 필리였다. LPGA투어는 올해 7월까지 총 1951개 대회가 열렸고 모두 275명(최소 1승 이상)의 챔피언을 탄생시켰다. 물론 지난 59년 동안 단 1승도 챙기지 못하고 이름 없이 사라진 선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LPGA투어의 역대 스타를 살펴본다.

LPGA 스타 계보

만능 스포츠우먼, 자하리아스
50년대를 풍미한 두 스타는 베이브 자하리아스(1914~56)와 패티 버그(1918~2006)다. 두 선수 모두 LPGA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특히 초대 LPGA 회장을 맡은 버그는 ‘LPGA투어의 샘 스니드’로 평가받는 장수 골퍼였다. 13세 때 골프를 시작한 버그는 16세 때인 34년 아마추어골프대회인 미니애폴리스 시티 챔피언십 우승을 시작으로 80년까지 무려 46년간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투어에서는 통산 60승(메이저 15승 포함)을 달성했지만 LPGA 발족 이전 대회 우승까지 합하면 80승이 넘는다. 메이저 15승은 LPGA투어 사상 최다승 기록이기도 하다.

자하리아스는 역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꼽힌다. 여성 골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운동신경과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선수다. 그는 LPGA투어 출범 첫해인 50년 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당시 3개 메이저 우승)을 달성했다. 메이저 10승을 포함해 통산 41승을 기록한 그는 프로골퍼가 되기 전 야구와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18세이던 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육상 3종목(투창, 80m 허들, 높이뛰기)에서 2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그가 골프 클럽을 쥐게 된 것은 올림픽 기간 중 스포츠 평론가인 그랜트랜드 라이스로부터 골프를 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나서다.

이후 47년 8월 프로 전향에 앞서 브리티시 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최고의 화제를 뿌렸다. 1893년 이 대회가 창설된 이래 미국 선수가 우승한 것은 자하리아스가 처음이었다. 자하리아스는 '투창' 금메달리스트답게 파워가 엄청난 선수였다. 540야드의 파 5홀에서 드라이버에 이어 4번 아이언샷을 해 투 온에 성공하는 장타력을 선보였다.

이 때문인지 그는 프로로 데뷔하기 전인 44년 ‘여자와 겨루는 것이 따분하다’는 이유로 PGA투어에 도전장을 내기도 했다. 골프 역사상 첫 번째 성 대결이었다. 첫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듬해인 45년 로스앤젤레스오픈에 출전해 기어이 컷을 통과했다. 암 수술을 받고 재기한 54년 US여자오픈에선 2위를 12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살아있는 두 전설, 라이트와 위트워스,
자하리아스가 쇠퇴 기미를 보이면서 새로 등장한 스타는 미키 라이트(1935~ )였다. 라이트는 19세이던 54년 US여자오픈에서 아마추어 1위를 차지한 뒤 프로로 전향했다. 데뷔 2년째인 56년 LPGA투어 첫 승을 시작으로 69년 은퇴할 때까지 14년 동안 메이저 15승을 포함해 통산 82승을 거뒀다. 4년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했고, 63년에 기록한 단일 시즌 13승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31세에 통산 70승, 33세에 통산 80승을 달성한 그는 팔과 다리 부상으로 34세에 은퇴했다.

라이트의 적수는 캐시 위트워스(1939~ )였다. LPGA투어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인 88승을 기록한 여전사다. 이 기록은 PGA와 LPGA투어를 통틀어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이다. PGA투어에서 82승을 기록한 샘 스니드보다 6승이 더 많다. 15세 때 골프에 입문해 58년 프로로 데뷔한 그는 3년 동안 1승도 거두지 못한 무명이었지만 62년 켈리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연승가도를 질주했다. 이후 68년 10승을 거두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열었다. 여자골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로 평가받는 그는 81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서 LPGA투어에서 최초로 1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선수가 됐다.

LPGA 대중화 이끈 로페즈
LPGA투어 대중화의 선구자 역할을 한 낸시 로페즈(1957~ ). 그는 70~80년대를 넘나든 스타 플레이어였다. PGA투어에서 아널드 파머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LPGA투어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LPGA투어의 파머’였던 셈이다. 루키 시즌이었던 78년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을 당시 대회장은 평상시보다 세 배나 많은 갤러리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그는 그해 무려 9승을 차지하면서 루키로서 ‘신인왕’과 ‘상금왕’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싹쓸이한 첫 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통산 승수는 48승(메이저 3승 포함). 그러나 아쉽게도 US여자오픈에서 세 차례나 준우승을 차지했을 뿐 정상을 밟지는 못했다. 82년 결혼 이후 투어에 다시 복귀한 그는 85년 5승을 차지하면서 41만6000달러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국제화 시대 연 소렌스탐
로페즈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선수는 단연 원조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약 10년 동안은 여러 선수가 경쟁한 춘추전국시대였다. 94년 소렌스탐의 등장은 LPGA의 국제화 시대를 열어젖힌 단초가 됐다. 소렌스탐은 2008년 15년간의 프로생활을 끝으로 공식 은퇴했지만 메이저 10승을 포함해 통산 72승의 업적을 남겼다. ‘상금왕’과 ‘올해의 선수’상을 각각 여덟 차례나 받았고 시즌 최저 평균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베어(vare) 트로피를 여섯 차례나 거머쥐었다. 2001년 LPGA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핑 대회에선 18홀 최소타인 59타를 기록, ‘59타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가 투어에서만 벌어들인 상금액은 2083만7280달러. 여자 골퍼로서는 최고액이다.

호주의 ‘여자 백상어’ 카리 웹이 96년 LPGA투어에 데뷔하면서 소렌스탐의 대항마로 나섰지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웹은 수퍼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이지만 통산 승수는 36승에 불과하다. 역대 상금왕도 세 차례뿐이다.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통산 24승의 박세리(32)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수출품으로 평가받았지만 상금왕에는 한 차례도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2007년 LPGA투어 10년차를 맞아 아시아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빅3’가 퇴조 기미를 보이면서 LPGA 최고 스타의 자리는 로레나 오초아(멕시코·통산 26승)가 물려받았다. 오초아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연속 상금왕을 차지했다. 최근엔 대표적인 ‘세리 키즈’인 한국의 신지애(21·통산 4승·2009시즌 상금랭킹 2위)가 골프 여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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