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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지금]하.걸프전 포화에 바빌론 문명 '상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지난 90년 미국 등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포탄을 쏟아부을 때 바그다드대 고고학 교수 무자힘 마흐무드 (52) 는 "인류문명에 대한 오만이며 무지의 소치" 라고 목청을 높였다.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메소포타미아문명 유적지로 덮인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곧 인류역사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터키 국경의 아르메니아 산악지대 만년설에서 발원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이라크를 관통하며 만들어진 두 강 사이의 비옥한 초원이 메소포타미아 (두 강 사이라는 뜻) 문명의 모태다.

기원전 3000년에 수메르인들이 도시국가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아카드→고대 바빌로니아시대를 거쳐 기원전 2000년에는 히타이트→아시리아시대를 거치며 통일제국이 형성되고 이후 신바빌로니아→페르시아 (기원전 6세기)→알렉산더시대 (기원전 3세기) 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역사의 무대가 바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주변이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으로 90㎞를 달리면 고대에서 가장 번창한 문명을 자랑했던 바빌론 힐레시가 나온다.

성 입구인 이슈타르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흑벽돌로 쌓아올린 4~5m 높이의 거대한 바빌론성이 방문객을 압도하는데 발굴된 성 둘레만 4㎞를 넘는다.

성 동편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반항을 상징한다는 바벨탑 자리가 있고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원형극장, 인류문명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공중정원터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유적지 곳곳엔 성벽을 쌓아 올렸던 흑벽돌은 물론이고 각종 석상들이 쓰레기처럼 방치돼 있다.

성 입구에서 기념품가게를 운영하는 이나시 (45) 는 "걸프전 이전에는 하루 수백명의 인부가 이곳에서 발굴을 했으나 현재는 모든 발굴계획이 취소됐고 그나마 발굴된 성마저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 며 안타까워했다.

이라크 문화재 당국에 따르면 걸프전 이후 발굴이 중단되거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귀중한 인류사 유적지가 20곳을 넘는다.

바빌론에서 남쪽으로 1백여㎞를 달리면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시원지라는 우룩에 도착한다.

수메르의 가장 오래된 도시이기도 한 이곳에서는 수백개의 그림문자 토판이 발견됐다.

인류 최초의 문자라는 쐐기문자의 모태다.

이곳 역시 걸프전 발발로 더 이상의 발굴이 중단된 채 먼지만 뒤짚어 쓰고 있다.

우룩에서 다시 남쪽으로 60㎞쯤에 위치한 우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곳에 거주하다 가나안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진 성지다.

입구엔 16m 높이의 흑벽돌 신전이 아직도 윤곽을 잃지 않고 서 있다.

그러나 신전들은 걸프전 당시 폭격으로 곳곳에 금이 간 채 방치돼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수천개의 설형문자 토판은 기원전 3000년의 인류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묻혀 있는 토판이 부지기수라고 확신한다.

최근 이곳을 방문한 창조사학회 신명균 (申明均) 기획실장은 "인류문명의 시초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고 말했다.

바그다드 북쪽 4백㎞에 위치한 님루드는 아시리아의 두번째 수도로 당시의 궁궐터와 성곽이 고스란히 땅속에 묻혀 있는 곳이다.

이곳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마흐무드 교수는 "걸프전 발발 전에는 하루 1백70명을 동원해 이곳을 복원했으나 8년째 예산이 단 한푼도 없어 발굴은 고사하고 발굴된 궁궐과 성곽 등에 대한 관리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 이라고 한탄했다.

최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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