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승삼 칼럼]인권에 '漸進'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필자는 9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약칭 정보공개법) 제정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정보공개법은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여야 3당 후보의 공통 공약사항이었다.

YS정부에서는 94년 7월에 이르러 총무처 주관 아래 정보공개법안심의위원회를 구성해 법안 마련에 들어갔다.

당시 심의위원회는 정부관계자 3명, 법학교수 3명, 시민단체대표 1명, 사법부에서 1명, 검찰에서 1명, 그리고 필자 이렇게 10명으로 구성됐다.

심의는 94년 7월 21일에 시작돼 96년 2월말까지 전체회의만 14차례 열면서 장기간 진행됐다.

우리 사회의 법률 마련 관행에 비춰볼 때 심의도 기록적일 정도로 길었지만 회의 내용도 결코 형식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따라서 최소한 심의위원회의 시안대로만 됐더라도 정보공개법의 신세가 오늘날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은 심의위원회의 시안 자체도 심의 중간중간에 관계부처와 기관들의 이의제기와 견제에 부닥쳐 후퇴하고 후퇴한 절충적인 시안이었다.

그런데 후퇴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심의위원회안은 그 뒤에도 관계부처 실무회의다, 관계기관 협의회다, 차관회의다, 조정회의다, 법제처 심사다 해서 그때마다 따귀 빼고 국물 빼는 식이 되더니 국회 심의과정에서 또 다시 물을 탄 뒤 탄생했다.

그게 바로 현행 정보공개법이다.

그러니 현행법을 두고 정보공개법이 아니라 '정보비공개법' 이며 공공기관의 비밀주의에 오히려 합법성을 부여한 악법이라는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정보공개법의 제정과정을 길게 설명한 것은 이름뿐인 법 제정 작업에 참여했던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효성이 없는 법은 차라리 제정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증언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과연 국민의 몇%가 정보공개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원하는 정보의 몇%가 공개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좋은 명분의 법이 시늉으로 끝나버린 걸까. 한마디로 그것은 법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권리를 제약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는데 똑같은 일이 변함없이 되풀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권법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인권법도 정보공개법과 마찬가지로 그 취지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보공개법의 경우는 그래도 민간 인사들을 참여시키는 모양새나마 갖추었으나 인권법시안은 아예 법무부 단독으로 마련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 손발을 묶는 법안을 만든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민간단체의 의견과 안도 참조했다고는 하지만 직접 참여해도 취지가 변질되는 판에 참여조차 안한 법률안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법무부가 지난 9월 25일 발표한 시안은 인권위원회라는 것이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의견표명과 시정권고를 할 수 있는 민간법인에 그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여당인 국민회의까지도 "기대에 크게 못미친다" 며 비판하고 있다.

서슬이 퍼런 권력기관.수사기관들이 민간법인이 의견표명하고 시정권고한다고 해서 "예 알았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할 것인가.

강제조사와 시정명령권을 갖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여야 수사기관들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느냐' 는 게 기득권을 지키려는 관료사회가 흔히 하는 주장이다.

지난 96년 정보공개법의 국회심의 과정에서도 법이 유명무실화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있자 당시 총무처장관은 "법이 제정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며 화살을 피했고, 한 여당의원은 "정부안대로 시행한 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 거들었다.

그들도 법에 문제가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진적 개선론에 꼴깍 넘어간 결과 정보공개법은 정보비공개법이 되고만 것이다.

지난 10일 여야 총재회담에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고문.도청.표적사정문제에 관해 "과거 내가 쓰라린 일을 당한 사람" 이라며 이에 관한 시정의지를 분명히 한 바 있다.

"문제를 내일에 가서 해결하자는 것은 해결하지 말자는 것과 마찬가지" 라고 마틴 루터 킹은 말한 바 있다.

특히 천부의 권리이며 생명과도 직결되는 인권문제를 점진론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최종길교수를 비롯한 의문사의 혼령들도 인권법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유승삼(중앙M&B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