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 상태 대북사업 돌파구 찾기…현 회장, 김정일 면담 요청 승부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현정은(54)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달 30일께 측근에게 갑작스레 “금강산에 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이달 4일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6주기 행사를 금강산에서 치르겠다는 지시였다. 현 회장은 2004년 이후 매년 금강산에서 정 전 회장 추모행사를 해왔으나 지난해에는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망 사건 탓에 가지 못했다. 현 회장의 결정에 그룹 실무진이 바빠졌다. 주말을 제외하고 나면 이틀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도 현대그룹 실무자는 현 회장이 그룹의 명운을 건 승부수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그룹 관계자는 “(정 전 회장 추모행사가) 단순한 추모를 위한 방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현 회장이 평양에 가기 전날인 9일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4일 정 전 회장 추모행사에 참석한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요청했다. 외형적으로 ‘평양 방문’이었지만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의 석방 문제와 대북사업 재개 등 현안을 김 위원장 앞에서 직접 논의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방북 전 정부와 어떤 이야기를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해 7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나서 겪은 그룹의 어려운 점과 협력사업 재개에 대한 그룹 회장으로서의 의견을 준비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13개월간 남북관계 경색으로 위축된 대북사업을 이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절박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아산은 현대그룹 전체 매출의 1.8%(지난해 기준)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대그룹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은 크다. 이 회사는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해 99년 2월 대북사업을 전담하는 법인으로 출범했다. 그룹 창립자의 유지를 받들고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현 회장은 대북사업이 좌초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대북사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하지만 지난해 7월 금강산 관광과 11월 개성 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사업마저 위축되자 현대아산은 위기에 빠졌다. 2007년 19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지난해 54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올해는 1분기에만 영업적자가 110억원에 달했다. 6월 말까지 금강산과 개성 관광 중단으로 발생한 매출 손실은 1536억원이다. 위기에 처한 현대아산은 3월부터 세 차례 구조조정을 했다. 1084명이던 직원을 411명으로 줄이고 임직원 급여의 일부를 지급 유보하는 조치를 했다.

조건식 사장은 “내년 2월 안에 사업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의 방북으로 현대아산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다. 조 사장 등 임원들은 11일 오전 회의를 열고 그동안의 진행과정과 북한지역 관광을 재개할 경우에 대해 논의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금강산 시설이나 개성지역에 필요한 인력이 현지에 남아서 시설을 관리해왔기 때문에 운영을 재개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정 전 회장 추모식 때 “금강산 내 호텔 등 관광 시설 등이 당장에라도 관광객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며 “관광 재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현 회장의 이번 방북은 유씨의 석방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유씨의 억류를 계기로 남북 경협이 더욱 위축됐고, 한국 정부가 남북 대화에서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많다. 한국 정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선 지난해 7월 금강산에서 북한군 총격에 사망한 고 박왕자씨 사건의 진상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요구했던 조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또 개성공단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서는 북측의 임금 인상과 토지 사용료 요구와 관련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문병주·강병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