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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제6장 두 행장

여러분네 들어보소/이내 타령 들어보소/인천장을 보려다/건너지 못해 못보고/육날 미투리 신천장/앞날이 끊어져 못가고/아궁 앞에 재령장/재담아 내다가 못보고/색시 많다 안악장/곁눈질 바빠 못보고/삼월삼진 곡산장/제비구경에 못봤소/잘한다 잘한다/장타령 한번 구성지다/가루 팔러 가려다/바람 불어 못가고/소금 팔러 가려다/비가 와서 못가고/

먼저 장날 오려다/날이 저물어 못왔고/오늘 장날 오다가/바늘 한 쌈 얻었소/얻은 바늘 버릴까/낚시나 한쌍 휘어서/휜 낚시 버릴까/만경창파에 드리웠더니/잉어나 한놈 걸렸소/걸린 잉어 버릴까/고추후추 양념에/식초에 재워 회쳐서/한잔 마시고 누웠더니/부모 생각 절로 나/우리 부모 날 길러/장돌뱅이 시켜서/가난 신세 벗자다/

요모양 요꼴 되었소/짚신장사 하다가/고무신 바람에 날리고/명주장사 하다가/비단바람에 날리고/무명장사 하다가/세루바람에 날리고/엿장사로 돌았더니/사탕바람에 날리고/물감장사 하자고/장마당에 왔더니/허가증서 없다고/세무서에 끌려가/물감 보따리 날리고/벌금까지 물고 나니/거지 거지 알거지/요모양 요꼴 되어서/안동장까지 왔으니/오징어 한 축 도매금에/이만삼천원인데/주저 말고/들여가소.

"저 청년은 테레비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난민처럼 비쩍 말랐는데도 장타령은 뱃심가진 소리꾼보다 더 구성져요. 친척이세요?" "동기간이라면 말이 되지. 왜? 젊은 녀석이라 관심 있나? 회계담당이어서 그러나" "좌판에 자주 들락거리는 한 사람이 또 있던데, 그 분도 같은 일행이세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낙네까지 합치면 우리 일행이 모두 넷이야. 자주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우리 행중의 우두머리여. 그 사람은 시방 정류장 근처에서 좌판 펴고 있지. 왜 자꾸 파고들어? 난전꾼들 탈세한다고 세금고지서 발부하려 날 신문하나?"

"쏘아붙이는 말투는 습관인가 봐요. 나처럼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별로 하는 일 없이 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 일행처럼 땀이 마를 사이도 없이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누가 눈여겨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부끄러워져서 그래요. 그렇게 못마땅하시면 이젠 묻지 않을 게요. "

"그렇게 얘기하니까, 사고싶지 않던 저녁 사고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일어나네. " "정말이세요?" "내가 지난 여름에 낙산 해수욕장에서 해변마담한테 빌붙어 살맛을 보려다가 보기좋게 딱지를 맞은 경험이 있어. 정말이세요 하고 다짐을 두니까, 문득 그때 생각나네. "

"오늘 하루 일진에는 저녁 얻어먹는 운수는 들어 있지 않았어요. 만화 같은 인생이죠 뭐. 하지만 공상만화도 요사이 우리가 쓰는 핸드폰하고 비아그라라는 약은 알아맞히지 못했대요. 선생님 저녁 산다면 공상만화서도 그려내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고 봐야겠죠. 차 한잔 살게요. 이것도 난생 첨일걸요. 맨날 계집애들한테 사기만 하셨지. "

"그런데 우리 아직 통성명도 없었지?" "차인숙 (車仁淑) .차간데도 천성이 쏘다니는 걸 싫어해요. 하긴 안동까지 흘러왔지만. "

그녀가 내놓은 인삼차 한잔을 대접받고 좌판으로 내려온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장꾼들도 모두 흩어져 차일을 거둘 때가 된 것이었다.

태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변씨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어땠어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제 말이 틀림 없었죠?

그래,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사건은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

글쎄 말입니다.

저 여자가 하루 종일 대선배만 내려다보고 앉았길래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같은 예감이 들더라니깐요. 사건은 무슨 사건인데요? 날 마도로스라고 부추기면서 저녁 사라고 조르더라. 그거 어려울 거 없죠. 대선배만 좋으시다면 저녁 기꺼이 사야죠.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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