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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장보고, 이순신 그리고 조오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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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한반도 역사에서 바다에 위세를 떨친 대표적인 인물은 장보고와 이순신이다.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해적을 섬멸하면서 남해의 ‘해왕(海王)’이 됐다. 조선의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고 남해의 해신(海神)이 됐다. 하지만 이들은 바다를 제패했을 뿐 인간으로 물에 동화된 건 아니었다. 권력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동화됐던 최초의 한반도 사람은 조오련이다.

조선이 흰옷을 입고 농사만 짓고 있을 때, 서양은 일찍부터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들에게도 해협횡단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20마일 도버해협(영국∼프랑스)은 마(魔)의 바다이자 꿈의 거리였다. 많은 이가 실패하다가 드디어 1875년 8월 27살의 선장 매튜 웹이 성공했다. 그는 약 22시간 만에 프랑스 해변에 도착했다. 농업국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바다를 헤엄쳐 건넌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한해협(부산∼쓰시마섬)은 도버해협보다 조금 더 길다. 그런데 1980년 조오련이 해낸 것이다. 미국헌법 이래 자유와 민주의 근대헌법이 한국에 들어오는 데에 161년이 걸린 것처럼, 해협횡단이 한국에 들어온 것도 105년이 걸린 것이다. 조오련은 2년 뒤엔 도버해협도 건넜다. 그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바다수영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조오련과 박태환은 같은 수영 스타지만 그들이 주는 역사적인 메시지는 종류가 다르다. 두 사람은 똑같이 18살에 국민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는 길은 달랐다. 조는 전라도 오지 해남에서 태어났고 오로지 수영을 위해 서울에서 구두닦이·점원을 했다. 반면 박은 특별한 생계 걱정 없이 자유롭게 수영을 배웠다. 조는 ‘헝그리 스위밍(hungry swimming)’이었고 박은 천식을 고치기 위해 수영을 시작했다. 박은 세계 금메달이고 조는 아시안 1위였지만 70년대의 한국엔 아시안게임이 올림픽이었다. 물론 박태환은 분명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특히 한국인 최초로 수영으로 세계의 벽을 넘었다. 그러나 박태환의 앞길에 ‘헝그리 코리아’의 조오련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몸으로 경제성장을 이끈 세대가 조오련이고 성장의 매끈한 과실이 박태환이다.

두 사람에게는 물개와 ‘마린 보이(marine boy)’의 차이가 있다. 조는 수영선수로 국민 앞에 등장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선 한국인 최초의 바다인간으로 우뚝 섰다. 헤엄쳐 해협을 건너거나 독도를 수십 바퀴 도는 것과 실내수영장을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거의 딴 세상 일이다. 수온을 견디려면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지방을 잔뜩 축적해야 한다. 조오련은 바다수영 때마다 체중을 불리곤 했다. 그리고 파도와 해파리, 낮은 수온과 싸우려면 ‘마린 보이’로는 안 된다. 물개여야 한다.

장거리 바다수영엔 기술과 체력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목적의식이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조오련에겐 여러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성공을 통해 재기하거나 건재를 과시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욕망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의 도전은 한국인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독도를 돌았던 2005년은 해방 60주년이었고 33바퀴는 독립선언서 33인이었다. 그는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에 맞춰 내년에 다시 횡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골퍼 톰 왓슨은 59세에 브리티시 오픈에서 준우승해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다.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내년에 58세의 조오련도 세계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마린 보이 박태환이 훗날 바다에 뛰어드느냐는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그가 살찐 물개가 되어 독도를 돌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걸 보고 싶다. 그가 국민의 남동생으로 머물기보다는 언젠가 조오련처럼 국민의 물개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쯤 조오련의 영혼은 이순신이 대첩을 이루었던 그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