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 한글 사용하는 섬 생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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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인도네시아 부톤섬 바우바우시의 찌아찌아족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한글 교과서로 찌아찌아어를 배우고 있다. [훈민정음학회 제공]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의 부톤섬. 총인구 16만여 명의 이 섬엔 6만여 명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산다. 이들은 닭은 ‘마누’, 개는 ‘아우’라고 부른다. 자신만의 언어 찌아찌아어(語)다. 찌아찌아족 초등학생들은 지난달 처음으로 민족어를 가르치는 교과서를 받았다. 표지에 ‘바하사 찌아찌아(찌아찌아어) 1’이라고 쓰인 책은 맨 앞장에 ‘가까나다타따라마바…’로 시작하는 한글이 적혀 있다. 여우 그림엔 ‘무상’, 오리 그림엔 ‘베베’라고 역시 한글로 쓰여 있다.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었던 찌아찌아족이 한글로 민족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한글이 처음으로 해외 민족의 공식 문자로 채택됐다. 훈민정음학회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바우바우시(市)가 이 지역 토착어 찌아찌아어를 표기할 공식 문자로 한글을 도입했다고 6일 밝혔다. 시는 지난달 21일 찌아찌아족 밀집 지역 소라올리오 지구의 초등학생 40여 명에게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나눠 주고 수업을 시작했다. ‘부리(쓰기)’ ‘뽀가우(말하기)’ ‘바짜안(읽기)’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교과서는 모든 글자가 한글로 돼 있다. 찌아찌아족의 언어와 문화, 부톤섬의 역사와 전통 설화, 한국 전래동화인 토끼전까지 소개됐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만나게 된 건 훈민정음학회 교수들의 노력 덕분이다. 학회 부회장인 한국외대 전태현(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가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의 사연을 학회 구성원들에게 전했고, 서울대 이호영(언어학과) 교수가 지난해 7월 바우바우시장을 만나 한글 사용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교수는 “바우바우시장은 한류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인상이 굉장히 좋았다”며 “찌아찌아족도 문자가 생긴다는 점을 기뻐했다”고 말했다.

이후 찌아찌아족 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학회 교수들과 교과서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이 교수는 “열대우림에서 살던 교사들이 추위와 향수병 때문에 몇 번이나 귀국하려 해 사업이 무산될 뻔했다”며 “우여곡절 끝에 한글 서사 체계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문자가 없는 소수 언어는 대부분 사멸 위기에 처한다. 언어를 기록할 수도,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구전(口傳)할 인구가 줄어들면 어휘도 조금씩 사라진다. 훈민정음학회 김주원 회장은 “이번 사업으로 사라져 가는 찌아찌아어와 문화를 살려낼 수 있길 바란다”며 “장기적으로는 찌아찌아족과 한국 사이의 유대도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훈민정음학회는 이번 사업을 발판으로 ‘한글 세계화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학회는 중국 헤이룽장 유역의 오로첸족이나 태국 치앙마이의 라오족, 네팔 체팡족 등 소수민족에게 한글 전파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반감이나 비체계적인 전파 방법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호영 교수는 “한글이 찌아찌아족의 일상생활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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