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클린턴 면담장에 강석주·김양건까지 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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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맞은 북한의 태도는 미국인 여기자 석방 문제를 통해 경색된 북·미 관계의 전환점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범죄자’ 석방을 위해 방북한 그에게 국빈급에 준하는 의전을 제공한 것이나, 성치 않은 건강 상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 클린턴을 맞은 것 등이 그렇다. 미국의 대북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북한은 공항에 화동(花童)을 보내 그를 환영했다. 또 그를 실은 특별기가 직항으로 순안공항에 오도록 하고, 환영식이 끝난 후엔 링컨콘티넨털 대형 리무진을 제공했다. 숙소도 외국의 국빈이 머무는 백화원 영빈관을 내주고 김 위원장이 만찬을 베푸는 등 국빈급 대우를 했다.

김 위원장은 또한 면담장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외교와 대남을 총괄하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대동하고 나왔다. 여기자 석방협상이 아니라 일종의 북·미 최고위급 대화로 연결 지으려는 북한의 속내가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왔다. 북한의 이 같은 의도는 공항에서부터 감지됐다.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공항에 나와 클린턴 전 대통령을 영접했다. 6자회담 통역인 최선희 외무성 국제기구국 과장이 공항에서 통역을 맡았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이 여기자 문제가 아니라 북핵 문제로 대립했던 북·미 관계의 연장선이란 메시지인 셈이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이날 “비행장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실무적인 사업수행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시키는 광경들이 펼쳐졌다”고 보도해 이 같은 해석에 무게를 실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한 북한의 기대는 이날 북한 언론 보도에서도 나타났다. 북한 언론들은 이날 오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도착부터 김 위원장과의 면담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특히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이날 밤 “김 위원장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 공동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해 폭넓은 의견 교환을 했다”며 “바락(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구두메시지를 정중히 전달했다”고 즉각 전했다. 긴급보도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 언론의 방송사고도 발생했다. 정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미국 전 대…”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경음악을 내보낸 뒤 방송을 재개한 것이다. 북한은 어렵게 잡은 이번 기회를 북·미 관계 돌파구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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