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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절의 전설적 ‘낭만 주먹’ 시라소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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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5·16 직후였던 1961년 5월 23일 종로. 이정재는 오랏줄에 묶인 채 정치깡패들의 선두에서 걷고 있었다.<사진> 그를 죽이려고 2년 동안 권총을 품고 다니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그날, 들끓던 살의(殺意)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이정재는 그해 8월 17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달 형장의 이슬이 된다.

시라소니가 누구던가. 신체 외에 다른 무기를 쓰지 않는 ‘낭만 주먹 시대’의 1인자였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형님’이라 불렀던 사람이다. 일제 때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박치기에 관한 한 ‘인간 미사일’이었다. 5m 이상을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헤딩에 하얼빈의 폭력배는 얼굴 전체가 함몰됐고, 상하이 헌병대장은 사흘 만에 깨어났다. 러시아 대장이 당긴 권총보다 박치기가 더 빨랐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왜 이정재에게 앙심을 품었던가.

이씨는 이천의 씨름꾼 출신이다. 전국대회에서 황소 10마리를 탈 만큼 힘이 좋았다. 당시 주먹들이 대개 무학(無學)이었던 것과는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6·25 때 피란지 부산에서 그는 텃세를 부리는 용가리패 10여 명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지나가던 시라소니가 순식간에 깡패들을 제압해버리고 이정재를 구해준다. 이 인연으로 이씨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맹세한다.

서울에 온 이정재는 김두한 밑에서 일하다 독립해 동대문 일대를 주름잡는다. ‘동대문 알카포네’로 불렸던 그에겐 라이벌 집단인 이북 출신 명동파의 식객으로 있는 시라소니가 버거워진다.

53년 시라소니는 이북 상인들의 민원을 청탁하러 이정재에게 간다. ‘아우’를 믿었기에 혈혈단신 맨몸이었다. 이씨의 사무실에는 도끼, 갈퀴, 절굿공이로 무장한 부하들이 수십 명 잠복해 있었고, 좁은 공간인지라 시라소니는 힘을 쓰지도 못한 채 어육(魚肉)이 된다. 이후 그가 병원에 있을 때 이정재의 부하가 습격해 성한 왼쪽 발을 다시 망가뜨렸다. 1년 만에 퇴원한 시라소니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사격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이기 전에 권력이 먼저 이정재를 덮쳐버리는 바람에 분노의 총알을 쓸 기회를 잃었다.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시라소니는 종교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인으로 살다 83년 숨졌다.

해방 이후 법질서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시절, 그것에 대행하겠다고 나선 주먹들. 최근 대중매체에서 그 시절 주먹에 대한 동경과 숭배가 확산되는 느낌이다. 사회의 정상적 시스템이 고장 나고, 억눌린 이들이 많아지면, 법보다 주먹이 멋져 보이는 것일까.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