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독서 고수] 곽재구 시인의 『포구 기행』을 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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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몇 해 전, 친구로부터 작은 소포 하나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뜯어보니 한 권의 책이었다. 겉장에는 ‘다 읽고 생각나는 사람이 너였어. 그래서 바로 우체국에 왔다.’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코팅되지 않아 종이 질감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책 겉장은 갯벌을 만지는 듯 했고, 메모를 떼어낸 뒤 비로소 나타난, 작은 배를 노 저어 오는 어부의 사진으로부터 이미 해풍은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 없이 하던 청소도 중단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살다보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다.’ 첫 문장부터 숨이 턱 막혔다. 시인 특유의 아름다운 언어와의 첫 대면에 나는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날, 해가 밝으면 맞이하게 될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설렘과 똑같은 뒤척임을 맛봤다. 작가는 그 어떤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책 속에는 그저 떠나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느끼고 싶고,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싶은 나를 풀어놓는 것, 그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작가는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맑고 아름다운 언어로 퍼즐 조각 자르듯 잘라 책장마다 켜켜이 쌓아 놓았고, 나는 머릿속으로 그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맞춰갈 뿐이었다.

그 퍼즐 맞추기는 강원도 외옹치항에서 끝났다. 책 선물을 받은 때는 마침 속초로 잡은 가족여행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다. 나는 일부러 마지막 포구 이야기는 남겨 두었다가 한창 사람들이 찾는 계절이 지나 쓸쓸함이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외옹치항에서 읽어나갔다.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횟집 기둥 사이에 나무젓가락을 비녀 삼아 꽂고 있는 오징어를 보았다. 속을 다 내주고 거죽만 남은 몸뚱이로 햇살에 물기마저 내주는 것이, 꼭 내 부모의 인생을 닮았다. 오징어는 내게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바람의 힘을 빌려 제 몸에 남은 마지막 짠 냄새를 보내왔다. 그 짠 냄새 속엔 바람의 말이 있었다.

“너 또한 네 부모처럼 자식을 위해 오징어 같은 삶을 살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다. 내 부모에게 받은 것을 내 자식에게 주고 사는 삶을 살라는 명령이, 꼭 그래야만 한다는 가르침이 내겐 고통이 아닌 고마움이었다. 어느덧 나는 그렇게 나만의 포구기행을 쓰고 있었다.

박은희(주부·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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