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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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물론 해질 무렵에 가서야 좌판을 편 황태는 매상이 신통치 않았다.

고추를 팔고 난 농민들은 일용품을 사지도 않고 총총히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느 장날이라면, 고추 판 돈으로 농우소를 바꾸거나 평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밭뙈기를 사들일 엄두를 낼 만하였다.

그러나 농촌 살림도 요즘 들어서는 소에게 받힌 것처럼 자국 없이 쪼그라들기만 해서 빚 갚기에만 급급할 뿐 일용품에 눈돌릴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해도 지기 전에 파장을 맞아 휑뎅그렁한 장터를 바라보고 있던 철규는 태호에게 다음 장까지 영양 인근의 시골을 돌며 고추를 사들였다가 다음 장날 외지 중개상들에게 되팔고 뜨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문을 챙길 수 있는 길도 있었지만,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자신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윤종갑이란 혹을 떼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호도 찬성이었다.

중개인으로 고용했던 조창범을 선술집에서 찾아냈다.

그러나 조창범은 난색이었다.

고추 산지를 직접 찾아간다는 발상은 얼핏 생각하기에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무싯날에는 쉽사리 고추를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집상인들에게 속아만 왔기 때문에 내림세든 오름세든 장터에 나와서 형성되는 시세만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수집상들이 마을마다 찾아다니면, 다음 장의 시세가 반드시 오름세가 된다는 것으로 짐작하기 때문에 잘못 흥정하다 보면 다음 장에 형성되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결과를 빚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듣다 보니 그럴 듯한 말이었다.

조창범의 조언을 받아들여 산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바꾸어 다음날에 열리는 장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영양읍내장 다음으로 장이 열리는 곳은 가근방에서 청기장과 수비장과 입암장이 같은 날에 열렸다.

조창범이 선택한 대로 입암장을 보기로 하였는데, 영양읍내에서 남쪽으로 불과 20여리 떨어진 면소재지였다.

물론 읍내장과 비교하면 매미소리만 요란할 정도로 한산한 장시였는데, 고추가 한물로 쏟아져 나올 동안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입암에서도 황태좌판을 아예 포기하고 고추를 수집하여 외지상인들에게 되팔아 삼십여만원의 이문을 보았다.

그 다음에 1일과 6일 터울로 열리는 석보장까지 찾아들어서 고추만 사고 되판 이문이 수월치 않았는데, 불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설치고 다녔던 사흘 모두를 따져보면 공중에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던 이문 백이십여만원을 챙긴 셈이었다.

그제서야 좋은 고추를 고르는 안목은 물론이었고, 한번 시세를 놓은 다음에는 벼락이 떨어져도 양보할 낌새를 보이지 않는 산지농민을 구슬려 흥정을 유리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 요령까지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중개인을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씨네가 중개인을 떼어놓고 3일과 8일 터울로 열리는 진보장으로 가려 했을 때 일어났다.

며칠 사이에도 안면이 익숙해져 격의 없이 지내게 된 조창범이가 그들 곁을 떠날 작정을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합의했던 수수료를 그때마다 여축없이 치러주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갑자기 귀가 먼 사람처럼 들은 척도 않았다.

그런 모습이 진국인 심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철규는 야박하게 굴 수도 없었다.

진보장까지라도 동행해서 뒷수발을 해드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었다.

출발을 서두르는 태호를 만류하고 위인을 끌고 길가의 구멍가게로 찾아들었다.

과자 한 봉지를 사 안기며 고마웠다는 말을 열 번 이상 반복했고, 머지않아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반복했지만, 역시 두꺼비 낯짝에 물 퍼붓기로 눈만 껌벅거리며 앉아 있었다.

위인이 사기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보장까지 반드시 동행해야 할 이렇다 할 명분도 없는 터에 무턱대고 길벗이 되자 하고 동행을 고집하는 속셈을 알 수 없었다.

결국은 성애술까지 사가면서 달래보았으나, 도대체 씨알이 먹혀들지 않았다.

이 위인을 떼버릴 재간이 없어 진보장까지만 동행하자고 적재함에 올려 태우고 말았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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