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린 “박태환 사진 걸어 놓고 설욕 다짐 … 이젠 떼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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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베이징 올림픽 이후 내 방에 박태환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있었다. 이제 그 사진 대신 그랜트 해킷(호주·은퇴)의 사진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장린(22·중국)이 와신상담 끝에 결국 웃었다. 장린은 3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 이탈리코 수영장에서 열린 200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800m에서 7분32초12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해킷이 보유하고 있던 7분38초65를 6초53이나 앞당긴 기록이다. 장린은 경기 직후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이제 나의 영웅이자 장거리의 전설인 해킷의 사진을 걸겠다”고 했다. 그의 시야에서 이미 라이벌 박태환은 사라졌다는 뜻이다.

#1년간의 와신상담

장린은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 박태환(20·단국대)에게 0.58초 뒤져 은메달에 머물렀다. 10대 때부터 중장거리 유망주로 촉망받았던 장린은 박태환의 등장 이후 슬럼프를 겪었다. 장린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200m·400m·1500m 금메달을 모두 박태환에게 내줬다. 베이징 올림픽 때도 박태환에게 막혔다. 올림픽 직후 중국 북경신보는 『삼국지』에 나오는 주유의 말을 인용해 ‘旣生桓, 何生琳(기생환 하생림·박태환을 낳고서 왜 다시 장린을 낳았는가. 박태환이 제갈량처럼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뜻)’이라고 한탄했다.

베이징에서 눈물을 뿌렸던 장린은 방에 박태환의 사진을 걸어 놓고 설욕을 다짐하며 훈련에 몰두했다. 장린은 “중국 남자수영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땄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장린은 이미 이번 대회 자유형 400m에서 3분41초35로 동메달을 따며 박태환의 아시아기록을 갈아치웠다.

노민상 경영대표팀 총감독은 “자유형 800m는 올림픽 종목이 아니고, 국내 대회에도 없는 종목이라 박태환은 출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태환은 자유형 1500m 예선에서 장린과 4조에 속해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라 둘의 장거리 훈련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중국 취재진은 “자유형 1500m에서 장린이 또 하나의 세계기록을 세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호주 전훈에서 꾸준한 지구력 훈련

장린은 지난 4월부터 3개월 동안 호주 전지훈련에서 지구력 훈련에 몰두했다. 호주에서는 해킷의 전 코치였던 데니스 코터렐에게 지도를 받았고, 중국인 전담 코치인 천잉훙도 동행했다. 장린은 2007년부터 1년에 한 차례씩 호주로 떠나 수개월간 집중 훈련을 받았다. 박태환이 대표팀과 개인 전훈으로 훈련 시스템이 분산돼 집중도가 떨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린은 자유형 800m 세계기록을 세운 후 “코터렐에게 감사 전화를 해야겠다”며 “천잉훙 코치에게 가장 고맙다. 자유형 400m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지만 동메달에 그쳐 힘들었다. 그때 코치가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네 플레이만 하면 된다’며 다독여 줬다”고 말했다. 외국인 코치에게 기술적인 부분을, 자국인 코치에게 심리적인 부분을 지도 받는 체계가 확실하다.

정일청 대한수영연맹 전무는 “장거리 기록이 좋다는 것은 지구력이 탄탄해 자유형 400m에서도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번 대회 장린의 행보가 미래를 준비하는 정답”이라고 말했다.

로마=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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