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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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커피 한 잔씩을 나눈 두 사람은 철규와 같이 좌판을 거두기 시작했고, 은주는 승희를 거들었다.

그들의 계획은 하루를 안동에서 쉬었다가 고추산지로 유명한 영양장을 볼 작정이었다.

승희가 은주를 안동으로 부른 것도 하루의 휴가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들의 숙소는 안동 신시장에서 예천 가는 길목에 있는 민박집이었다.

나이 칠순에 이른 노부부들이 널찍한 방 두 개로 민박집을 열고 있었는데, 승희가 수소문해서 알아낸 집이었다.

노부부의 심성이 무던해서 부엌을 빌려주고 마루까지 차지하고 떠들어도 군소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집 안에 왔다갔다 하며 떠드는 것이 사람 살고 있는 집 같아서 오히려 뿌듯하다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다가 그 댁의 식기를 빌려 저녁까지 지어 먹기로 하였다.

은주는 여독이 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곧잘 승희를 따라 저녁밥 짓는 일을 거들었다.

어쩌면 태호가 보라 하고 승희가 묘책을 짜내 은주를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은주 역시 밥 짓는 일을 재미있어 하는 것은 분명했다.

저녁 먹은 이후에 피곤을 핑계하는 철규를 남긴 세 사람은 거리로 나섰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불빛이 아늑한 생맥주집으로 찾아들었다.

그 자리에서 은주는 사흘의 휴가를 얻어 안동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승희가 태호를 힐끗하며 반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휴가까지 얻어서 내려올 가치가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네. " "여기 있잖아요. " 은주가 머리 끝으로 태호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자 승희가 넘겨짚었다.

"그럼, 영양까지 동행해도 되겠네?" "그럼요. 안동에서 백오십리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라는 것도 벌써 알고 있는데요. " "태호씨가 퇴짜를 놓으면 어떻게 할까?" "퇴짜 놓으라지요. 언니 따라가면 되잖아요. " 태호는 그때 문득 낙산사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변씨의 독백이 떠올랐다.

은주도 변씨가 말했던 옛날의 그 여자처럼 자기가 무턱대고 좋은 것일까. 그것이 아니고는 휴가까지 내 자기를 찾아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사뭇 말참견을 주저하고 있던 태호가 물었다.

"그때 동행했던 두 친구들은 잘 있어요?" "그럼요. 내가 안동까지 왔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는 걸요. 그뿐만 아녜요. 역까지 나와서 환송까지 해주었지요. " "법석을 떨었군요. 셋은 항상 그래요?" "그래요. 우리 셋은 좀 특별한 편이에요. 비밀도 없고, 법석 떨기 좋아하고, 조그만 일이 생겨도 큰 난리라도 터진 것처럼 정신 없이 극성 떨고 그래요. 그러다가 나중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걸 알고 또 다시 모여서 한참 웃어대곤 해요. 우리 셋은 언제부턴가 그렇게 정신 없이 살아요. 생판 남남인데도 그래요. "

"오늘도 같이 뭉치지 못한 게 섭섭했겠네요. " "일요일이었으면 적어도 안동까진 동행하고 말았을 거예요. 하루가 궁금해서 못견디는 친구들이거든요. "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가야 할 짐을 지고 왔군요. 그렇다면 노래방에라도 가야겠죠?" 셋은 다시 맥주집을 나와 노래방을 찾았다.

말과는 달리 은주는 노래를 시키면 생글거리기만 할 뿐 끝까지 노래는 부르지 않고, 두 사람이 앞다투어 부른 노래에 음향기기만 조정해주었다.

민박집으로 돌아간 시각이 밤 12시였다.

철규가 혼자 자다가 태호가 돌아온 것을 알아채고 부스스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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