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 일본 정치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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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9일 일본 남부 규슈(九州)에 있는 구마모토(熊本)시의 주민 체육관. 다음 달 30일 총선을 앞두고 현지 지역구의 지원 유세에 나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가 나타나자 지지자들은 열렬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상당수 지지자들은 하토야마의 얼굴과 함께 영문으로 ‘Manifesto’라고 쓰인 팸플릿을 흔들었다. 24쪽짜리 팸플릿에는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을 누르고 승리할 열쇠를 담은 매니페스토(정책 공약)가 담겨 있다.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의 ‘매니페스토 정치’가 일본 정치 풍토와 정국을 변혁시키고 있다. 대규모 집회 대신 소규모 가두연설이나 강연회를 통해 선거운동을 하는 기존 정치 풍토에선 중의원 선거는 언제나 자민당의 독무대였다. 집권 자민당은 선심성 예산을 내세워 유권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야당에는 그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3년 민주당에 의해 매니페스토 정치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자민당에서 탈당하거나 군소 야당 출신들이 모여 1996년 창당한 민주당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는 신생 야당에 불과했다. 이들이 집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던 민주당은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매니페스토 정치’로 돌파구를 찾았다. 정책을 밝히고, 나중에 실현 여부를 평가받겠다는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생소한 이름에 신기해하면서 민주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민주당은 초등학교 교실 정원 30명 이하 축소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의석을 40개 더 늘리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의 영향력은 이때부터 쑥쑥 커지기 시작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의 인기 때문에 자민당에 고전했지만,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선 압승할 정도로 급신장했다.

다음 달 30일로 예정된 이번 총선에서도 민주당의 매니페스토가 폭발적인 관심을 끌자 자민당은 예정을 앞당겨 28일 매니페스토 주요 내용을 공개했다. 가계 소득 100만 엔 증대, 출산 여성의 직장 복귀 지원, 고령자 근로환경 확대 등을 간판 공약으로 내세웠다. 민주당의 아동수당 신설과 출산비 지급에 대한 맞불 정책이다.

양당의 매니페스토가 공개되자 일본 신문들은 연일 1면 톱과 주요 지면을 통해 치열한 검증을 벌이고 있다. 정책 선거가 자리를 잡으면서 후보자들의 비방·폭로전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후보자들이 매니페스토를 유권자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인신 공격 등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TV도 연일 전문가들을 불러내 매니페스토의 현실성을 따지고 있다. 매니페스토로 인해 선거가 정책의 경연장이 되는 선진 정치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시선이 매니페스토로 쏠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여당 프리미엄도 힘을 잃고 있다. 정국 안정론과 인물을 앞세웠던 자민당의 기존 전략이 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오히려 민주당의 정책 공약을 검증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형국이 되고 있다. 민주당은 이에 맞서 다음 주부터 전국 10개 지역 거점 도시에서 매니페스토 설명회를 열기로 하는 등 민주당 바람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또 매니페스토 바람을 더욱 확산하기 위해 여성 핸드백에 쏙 들어가도록 B5 크기로 만드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매니페스토(Manifesto)=정당이나 후보자가 선거 공약을 제시할 때 목표·우선순위·절차·기한·재원의 다섯 가지를 가능한 한 구체적 수치로 명기하게 하자는 정책선거운동. 영국에선 1997년 총선 때 노동당의 블레어 후보가, 일본에선 2003년 지방선거 때 마쓰자와 후보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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