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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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한 마리의 강아지를 안고 찾아와도 탓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파 몇 뿌리를 자배기에 담아와 골목을 가로막고 앉아 있어도 빈축을 받지 않았다.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메밀묵을 먹어도 실례가 되지 않으며, 하루종일 입에서 육두문자가 흘러나와도 불상놈이란 누명을 쓰지 않아서 편안한 유일한 장소가 바로 장터였다.

명예퇴직도 없고 퇴출당할 걱정은 더욱 없었다.

상관 눈치 때문에 가슴 조일 까닭 없고, 출퇴근 따로 두고 허겁지겁 줄달음칠 일도 없었다.

자기가 싫으면 그만 두는 것이고, 내키면 또다시 나와 좌판을 떡벌어지게 차린다 해도 험담하거나 내쫓기는 봉변을 당하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 마주 앉아 혼담을 벌여도 흉허물이 있을 수 없고, 고쟁이에 주머니를 달고 다녀도 볼품없이 여기는 사람도 없다.

궂은비 내리는 날, 남의 추녀 밑에 쭈그리고 서서 안주 없는 깡소주를 마셔도 가슴에 불지르기는 마찬가지고, 꾸부정한 삭신 위로 떨어지는 초가을 햇살이 달기도 마찬가지다.

십원짜리 에누리에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기는 조바심과 긴장감도 마찬가지고, 차가운 블록담에 기대 앉아 졸고 있어도 그 가슴에 더운 피가 흐르는 것도 매한가지다.

때묻은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한잠이 들어도 목 부러지는 불상사 있을 수 없고, 한 달이 넘게 이 장 저 장 끌고다녀서 고기보다 소금이 더 많은 간고등어를 생어물로 팔아도 잡아가는 일이 없다.

밥풀로 덕지덕지 기운 천원짜리 낡은 지폐도 소중하게 접어 거두는 헐하고 너름새 있는 인심을 탓하지 않고, 천하에 짝이 없는 날강도라 하더라도 에누리는 할 수 있겠지만, 난전의 물건을 탈취하지는 못한다.

신창원이가 제 안경을 쓰고 배회한다 해도 알아볼 사람 없겠지만, 지난 장날 배추 한 단 사간 단골의 얼굴은 먼발치에서도 대뜸 알아본다.

휘장 친 선술집 낯모르는 술좌석에 슬쩍 끼어 앉아도 한 잔의 술은 떼논 당상이고, 반반한 여자만 보았다면 바지를 홀딱 벗을 줄 안다는 클린턴을 삿대질하며 욕해도 고발당하지 않아서 좋은 장소가 장터다.

느닷없는 배완호가 끼어들어도 괄시를 당하지 않는 장소는 그래서 5일장터뿐이었다.

그를 한씨네 좌판에 매복시킨 것이 잘된 일이었고, 변씨가 사라지고 난 뒤부턴 그들의 정체가 탄로날 염려까지 없게 되었다.

변씨처럼 아침 장터를 속속들이 둘러보는 버릇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종갑이나 봉환이 눈치 채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바로 배완호였다.

그는 물론 처음 황태 좌판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그날 팔고 있는 시세를 알려주는 역할을 여축없이 치러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몇 번인가 한씨네의 거동을 살피는 것도 좋았는데, 그 빈도수가 승희 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배완호는 승희가 한씨네와 동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좌판은 다른 곳에서 펴고 있었지만, 좌판을 거둘 때는 철규나 태호 중 한 사람이 와서 거들었고, 같은 차에 올라 다음 장터로 이동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 두 사내 중 어느 누구와도 부부 사이는 아니라는 것은 윤종갑의 귀띔으로 알고 있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매복해서 승희의 거동을 관찰하며 그날의 매기를 점쳐보는 것이 배완호의 주된 일거리였다.

처음에는 감시의 대상으로 그녀를 관찰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부터 그 관심의 향방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배완호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꽤나 매력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닥친 궂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찬 성깔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이문을 남기려고 아득바득 대들지 않는 너름새도 엿보이는 여자라는 것을 목격하였다.

햇살이 따가운 위에 화덕에선 종일 더운 기운이 북북 찌는데도 불구하고 화덕 곁을 줄기차게 지키는 것이었다.

시골 아낙네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덧거리를 건네는 인심도 시원시원하였고, 좌판을 찾는 고객들이 뜸할 때면, 안달하지 않고 잠깐 짬을 내어 먼지 묻은 신문을 털고 열독하는 모습도 여간 신선한 게 아니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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