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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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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자민당 총재=일본 총리’. 1955년 자민당 창당 이래 일본 정가를 지배해온 공식이다. 자민당 총재가 되고서도 총리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딱 한 사람의 예외는 바로 며칠 전까지 중의원 의장이었던 고노 요헤이다. 고노는 93년 총선에서 제1당의 자리는 지켰지만 과반수에 못 미쳐 8개 군소 정당의 연립 내각에 딱 한 번 정권을 내준 직후의 자민당 총재였다. 하지만 그건 ‘원 포인트 릴리프’에게 마운드를 잠시 넘겨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연립내각의 자중지란이 빚어진 틈을 타 자민당은 10개월 만에 여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니 자민당은 여당 53년에 야당 경험은 딱 10개월이다.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에선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자민당은 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했다. 그래서 정식 당명은 자유민주당이다. 좌파 이데올로기가 확산일로에 있던 시절, 혁신정당(사회당)에 정권을 넘겨줄지 모른다는 보수 세력의 위기감의 발로였다. 이로 인해 보수-혁신의 대결 구도, 이른바 ‘55년 체제’가 완성됐다. 대체로 자민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사회당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력 분포가 사회당이 몰락하는 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일본식 황금분할이랄까. 일본 국민의 정치 성향의 비율이 대략 그랬다. 자민당은 일본의 성공 신화를 이끈 주축이다. 정치 안정과 유능한 관료집단의 행정력을 등에 업고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정당이다. 나쁘게 보자면 정·경·관 유착과 규제 만능의 관료주의, 그에 따른 비효율의 체질을 만들고 키운 것도 자민당이다.

이제 고노 이후 처음으로 자민당 총재가 총리 자리에 오르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총선을 한 달 남짓 앞둔 시점에서의 각종 여론 조사는 압도적으로 민주당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벌써부터 관료들은 새로운 주군이 될 민주당에 줄서기가 한창이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중앙 부처의 국장급 이상은 전원 교체될 것이란 살벌한 소리가 들리는 판이니 오죽하겠는가. 한 민주당 의원이 며칠간 사무실을 비웠더니 그새 다녀간 관료 수십 명의 명함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영혼 없는 행태가 바다를 사이에 둔 두 나라에서 어쩜 그리 닮았는지. 어쨌든 정권교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후각이 가장 예민한 관료 집단이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생존 본능이 발달한 생쥐 떼가 난파선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리듯.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