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쉼터 정자]8.밀양 단장면 반계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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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만리장성' 이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라면 한국은 '정자' 를 내세울만 한다.

가히 우리나라는 '정자의 나라' 라고 할 만큼 전국 어디를 가나 정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자 자체가 지닌 건축미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뛰어난 풍광, 정자에 얽힌 삶의 애환 등을 적절히 엮으면 뛰어난 관관상품이 되고도 남는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는 대부분의 정자들이 보호 차원에서 관람객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 보다 빨리 폐가 (廢家)가 되듯이 정자 또한 사람의 온기가 스치지 않으면 애써 보호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색다른 정자가 있어 주목된다.

경남 밀양시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언양 방면으로 가다 보면, 단장면 면소재지를 만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지방도 1044호선을 따라가면 표충사에 이른다.

면소재지에서 표충사에 이르는 길은 단장천 (丹場川) 이 애인처럼 동행한다.

물이 맑아 주위의 산들이 그림처럼 비치고 여기저기 너른 바위들이 마치 홍등가의 미인처럼 길손을 유혹한다.

표충사를 7㎞쯤 앞두고 '북능소' 라는 자연발생 휴양지가 나온다.

강 건너 산기슭에 고가 (古家)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중심에서 벗어나 독립 채로 있어 시쳇말로 '별장' 의 냄새를 풍긴다.

단장천이 가로막아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아마 주인은 단장천에 속세의 때를 씻고 건너오라는 뜻인가 보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너 집 앞에 이르면, 아담한 솟을대문 안으로 '반계정 (盤溪亭)' 현판이 보인다.

밀양 지역의 정자들이 대개 낙향한 전직 중앙관료들이 세운 것임에 반해, 반계정은 이 지역 산림처사 (山林處士) 반계 이숙 (李潚 : 1720~1807) 이 영조 51년 (1775)에 창건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인 반계정은 내부 한칸에는 온돌을 놓았다.

이는 강가에 있어 습기와 추위를 막기 위한 방편인 것 같다.

반계는 이 정자에서 고을 문인들과 청담을 나누고 시를 읊었다.

정자 안에는 당시 문인들이 남긴 현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우리의 관심은 이 정자를 보호하는 방법에 있다.

창건 이후 수차례 중수를 거듭해 오늘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집을 비우지 않은 점이다.

지금 관리인은 김손만 (66.여) 씨. 10여년 전부터 고시생을 두거나 민박을 치면서 정자를 관리해 왔다.

"뒷산이 정각산이고 앞산이 말등처럼 생겨 고시합격자를 몇명 배출했지요. 결혼할 때면 꼭 이곳에 들려 인사하고 간다" 고 자랑한다.

별채에도 마루와 방이 2개 있어 가족단위로 이용할 수 있다 (방 1개 1박 2~3만원) .반계정은 행정구역상 단장면 범도리 (泛棹里)에 속한다.

지명으로 미뤄 마을 지형이 '물위에 떠 있는 배의 노' 와 같다는 뜻이다.

반계정은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위치로 보아 풍수해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초병 역할도 맡고 있다.

글.사진=최영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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