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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묵호댁이 채소가게 앞에서 병나발을 불고 있을 때부터 거동이 수상쩍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 채 한 시간이 넘지 않아 묵호댁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망측스런 소문을 듣고 윤종갑이가 가게로 달려왔고, 심지어 변씨의 아들 형식이까지 달려왔다.

가게문 밖에도 대여섯의 이웃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물걸레가 된 묵호댁을 방으로 업어다 누이자마자 입에서는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 달려왔던 형식이와 같이 한자배기나 되는 걸찍한 토사물을 처치하고 났을 때, 하얗게 질린 윤종갑이가 허둥지둥 가게로 들어섰다.

창피하고 겸연쩍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자살소동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을 내쫓을 수 없었다.

우선 토사물로 범벅이 된 묵호댁의 겉옷부터 갈아 입혀 대강 수습한 뒤, 문을 닫고 가게의 술청으로 나왔다.

윤종갑과 형식과 평소에 묵호댁과 배짱이 맞아 친숙하게 지내던 이웃 아주머니 몇 사람이 궁싯거리고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형식이부터 돌려보낸 뒤 봉환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웃 아주머니가 갖다준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어째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어?"

"나도 모를 일이시더. 니기미, 말 몇 마디 쥐어박았을 뿐 손찌검도 안했는데, 저 년이 비겁하게 온 동네가 날벼락 맞은 소동을 피웠으니 내일부터 선착장에 낯짝 들고 나댕기지도 못하게 됐뿌렀네요. " 윤씨는 소동이 벌어진 시초를 얼추 짐작할 것 같았다.

과천에서 뺨 맞고 영등포 와서 눈 흘기더라고 승희가 저지른 일로 가슴에 못이 박이고 말았지만, 분풀이할 구실을 찾지 못하고 있던 봉환이가 마침 애꿎은 묵호댁에게 설분하려 들었다가 벌어진 자살소동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묵호댁이 욱하는 성깔 하나는 봉환에게 뒤지지 않는 아낙네인데, 봉환의 말처럼 비겁하게 자살소동은 왜 벌였을까. 더욱 난감한 것은 형식이를 돌려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에서 순경이 찾아온 것이었다.

부부 사이에 어떤 불상사가 있었기에 묵호댁이 자살하려 했는가, 장소는 어디였고, 두 사람이 결혼은 언제 했느냐는 둥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미주알고주알 파고들었다.

게다가 파출소까지 동행해야 한다고 얼러댔다.

도대체 적당히 얼버무려도 될 소동을 어떤 위인이 파출소에 잽싸게 신고해 봉환을 더욱 난처하게 만든 것일까. 순경은 자꾸만 봉환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파출소로 가자는 것이었다.

탈옥수 신창범이나 잡는 데 신경 쓰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공무집행방해죄 한 가지를 더 뒤집어쓸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으며 버티고 있는데, 윤종갑이가 나서서 귀엣말로 순경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윤씨의 손길을 뿌리치던 순경 두 사람이 내키지 않는 거동으로 가게를 나간 것은 밤이 깊어 새벽 1시나 되어서였다.

그제서야 봉환은 팔짱을 끼고 서성거리던 이웃 아낙네들을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다.

순경들과 같이 나간 윤종갑은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을 따돌리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 분명했다.

두 시간 이상이나 지나서야 나타난 윤종갑의 얼굴에는 주기가 완연했다.

그날밤에 벌어졌던 자살소동은 그래서 봉환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장삿길로 나서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녀가 술에서 완전히 깨어난 이튿날, 정비업체에 맡겨 두었던 용달트럭을 꺼낸 봉환은 그대로 차를 몰고 윤종갑을 찾아갔다.

가게운영이나 거래관계는 승희가 떠나기 전 두 여자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던 눈치였기 때문에 봉환이가 잘난 체하고 간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봉환도 떠나는 것에는 누구보다 홀가분한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묵호댁과의 관계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주문진을 떠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털어내는 일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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