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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에이전트에 축구 골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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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례 1=이근호는 지난겨울 낭트(프랑스)→빌럼II(네덜란드)→파리생제르맹(프랑스)→위건(잉글랜드)→오덴세(덴마크)를 떠돌며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퇴짜만 맞았다. 입단이 확실하다는 에이전트 말만 믿고 몇 달간 유랑생활을 한 셈이다. 갈 곳을 잃은 이근호는 궁여지책으로 주빌로 이와타(일본)에 입단했다. 지난달 그의 에이전트는 파리생제르맹 진출이 확정된 것처럼 발표했다. 그 말을 듣고 이와타에 고별인사까지 한 이근호에게 파리생제르맹은 “영입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사례 2=최근 국내 프로팀에 입단한 한 외국인 선수는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깜짝 놀랐다. 계약금 2만 달러, 연봉 10만 달러로 알고 왔는데 계약서에는 계약금 32만 달러, 연봉 22만 달러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차액은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게 분명했다.

#사례 3=이천수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페예노르트가 이적시킬 경우 반드시 응하기로 한 이면계약이 있다”고 주장했다. 에이전트와 짜고 만든 거짓말이었다. 그 에이전트는 몇 해 전 안정환이 독일에서 뛸 당시 1억5000만원을 받아 빼돌린 혐의로 최근 고발당했다.

축구계가 ‘부실 에이전트’로 인해 멍들고 있다.

국내 프로 스포츠 중 야구·농구는 에이전트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축구는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자격 시험을 치러 공인 에이전트를 뽑는다. 선수와 구단 사이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일부 부실 에이전트 탓에 되레 축구판을 망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근호의 에이전트는 올해 들어 두 차례나 대책 없이 국가대표 주전 스트라이커를 유럽으로 데리고 가 테스트를 받게 했다. 한동안 무적(無籍) 선수가 돼 하마터면 월드컵 출전 등의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 2004년에는 에이전트가 중간에 낀 외국인 선수 영입 비리로 감독·구단 관계자 등이 처벌받았지만 비슷한 비리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게 축구계의 중론이다.

자격 시험도 무자격 에이전트를 걸러내지 못한다. 자격증이 없어도 활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고, 필요할 때만 FIFA 공인 에이전트에게 사례금을 주고 자격증을 빌린다. 게다가 “나와 계약하면 연봉을 훨씬 더 받게 해 주겠다”는 데 쉽게 현혹되는 선수들도 무자격 에이전트의 근절을 어렵게 한다. 이런 에이전트일수록 선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일쑤다. 박지성·이영표·이청용 등이 한두 에이전트와 꾸준히 관계를 맺어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한 프로구단의 관계자는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하는 에이전트는 점점 도태되는 구조다. 축구협회가 자격증만 발급할 게 아니라 이들을 적절히 관리·감독해야 한다. 또 자격증을 가진 에이전트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축구협회는 지난달 무리한 해외 이적을 추진해 물의를 빚은 에이전트 한 명을 기피 인물로 선정, 각 구단에 통보했다. 프로구단 실무위원회에서도 “문제가 많은 에이전트 명단을 공유하고 이들과는 거래를 하지 말자”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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