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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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맥반석구이도 매기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승희 혼자서도 감당할 만하였다.

담배 한 개비를 모두 태울 동안 줄곧 황태 좌판을 바라보고 있던 변씨가 슬며시 일어섰다.

길을 건너 좌판으로 다가간 변씨는 느닷없이 철규에게 초인사를 건넸다.

초면인 사람과 안면을 트자는 듯 갑자기 초인사를 건네는 변씨의 속셈을 잽싸게 알아차린 사람은 철규 아닌 태호였다.

어리둥절한 채 선웃음 짓고 있는 철규를 밀치고 태호가 변씨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깍듯이 인사수작을 주고받은 뒤 둘러선 장꾼들이 들으란 듯 큰소리로 물었다.

"손님께서 건어물 도매상을 경영하고 계신 것 같은데, 황태 몇 쾌를 구입하시렵니까?" "글쎄…. 수량이야 흥정하기에 달렸겠소만, 이 상품이 올해 강원도 진부령 덕장에서 나온 노랑태가 틀림없겠지요?" "틀림없습니다.

여기 원산지 표시가 있지 않습니까. 의심스러우면 여기 적힌 대로 전화 걸어서 원산지에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전화요금은 저희들이 부담할테니까 걸어보세요. "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드는 태호에게 변씨는 손을 내저으며 가로막았다.

"꼴사납게 그럴 거까진 없구…. 그런데 수량이 많으면 가격을 더 낮춰줄 수 있겠소?" "몇 쾌나 사실 겁니까?" "한 이백 쾌쯤 생각하고 있소. " 변씨의 행색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태호는 난처한 모양이었다.

"도매상을 경영하시는 분이 틀림없군요. 그러나 도매상에 넘기려면 저희들이 왜 강원도에서 안동까지 험한 길을 찾아와 뙤약볕에서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있겠습니까. 소비자들이 유통마진이 없는 토종 노랑태를 맛보게 하려는 원래의 목적 때문에 이 고생들 하고 있는 겁니다.

선전기간 동안은 반값에 드린다는 사기꾼들도 있습니다만 저희들은 그런 엉터리는 아닙니다.

손님에게 몽땅 넘기고 손털고 떠난다면 우리도 다리 뻗고 쉬겠습니다만, 그렇게 못하는 우리 사정이 딱하겠지요? 점포 가진 분이시든, 일반 가정 소비자들이든 가격을 더 이상은 낮출 수도 없거니와 한 사람에게 다섯 쾌 이상은 팔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주십시오. " 태호는 더이상 변씨와 수작 않고 싹 돌아서버렸다.

변씨가 머쓱해 돌아서면서부터 둘러서서 장타령이나 듣고자 하였던 장꾼들이 황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상술이라고 말하긴 떳떳하지 않아 그들 스스로도 꺼림칙하였으나 종잣돈을 까먹을 위기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비열한 술수로나마 장꾼들을 부추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술수에 기대어 매기를 추스르자면, 또한 뒤따르는 곤욕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좌판을 자주 옮겨야 하는 고충이 그것이었다.

사기꾼들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자주 좌판을 옮겨야만 들통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터를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 옮겼다가 서쪽으로 옮겨다닌 게 그날 하루해가 진 뒤에 손꼽아보았더니 다섯 차례나 되었다.

변씨와 같은 바람잡이가 많다면 수다스럽게 좌판을 옮겨다니지 않아도 되겠지만, 세 사람뿐인 인원으로선 그나마 버릇되기 전에 진작 걷어치워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종일 장바닥의 먼지를 휩쓸며 곤욕을 치렀는데도 남은 이문은 10만원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한 자리를 지키며 4만원의 이문을 남긴 승희에게 빈축만 산 꼴이었다.

그러나 낯선 고장에 뜨내기 노점상으로 불쑥 들어와 그만한 이문이라도 보았다는 것을 천행으로 알아서 안동장으로 오자고 고집을 부렸던 철규에게 허물이 돌아가진 않았다.

돈 벌지 못해도 좋다는 것이 인생관이 되어버린 변씨는 오히려 일행들을 부추겨 버스정류장 부근에 있는 소줏집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술이 거나해지자, 자연 주문진에 두고온 봉환이 그리웠다.

그가 있었다면, 매상이 그토록 보잘것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미련 때문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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