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제2부 4.구룡폭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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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혹시 비안개 때문에 구룡폭을 못 보게 될까봐 펄쩍펄쩍 뛰면서 일행을 앞서 나가니 뒤에서 고은선생이 넌지시 던지는 말이 들려왔다.

"저 나이에도 저렇게 천둥벌거숭이로 뛰어간다는 것이 신통하고도 방통하다. " 누가 봐도 표가 나게 나를 편애해 온 고은선생은 지금 구룡폭을 향해 달리는 나를 해맑은 천진성으로 보며 흐뭇해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나는 다른 욕망에서 뛰고 있었다.

구룡폭은 내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는 '조선시대 화인열전 (畵人列傳)' 에 반드시 두 번은 나와야 하는 한국회화사의 현장이다.

우선 이곳은 조선 후기 낭만적 반항의 화가 최북 (崔北) 이 자살 소동을 벌인 곳이다.

최북은 자신의 이름 북 (北) 자를 둘로 쪼개 칠칠 (七七) 이라고 했는데 어느 해 구룡폭에 와서는 갑자기 크게 웃다가 또 갑자기 크게 울더니 "천하의 칠칠이가 천하명승에서 죽지 않으면 어디서 죽겠느냐" 며 구룡연 (九龍淵)에 몸을 던졌다.

마침 그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 목숨은 건졌는데 과연 칠칠이다운 사건이었다.

또 하나는 단원 (檀園) 김홍도 (金弘道) 의 '구룡폭' 그림 3폭에 대한 미술사적 해석을 위한 현장검증이다.

단원은 1788년 9월, 그의 나이 44세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 그림을 그리러 갔다.

가서 40여일 머물면서 수백장의 사생을 담아왔으며 그렇게 해서 정조에게 바친 '금강산도' 는 50여m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고 한다.

지금 이 그림은 행방을 알 수 없고 그 대신 초본 (草本) 으로 생각되는 '금강사군첩 (四郡帖)' 60폭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구룡폭 그림은 발군의 명작이며, 이후 단원은 이 환상적인 소재를 즐겨 그린 듯 지금 간송미술관과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한 폭씩 소장돼 있는데, 이는 단원 화풍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단원이 구룡폭을 어떻게 회화적으로 재해석했는가를 살피려면 반드시 먼저 그 대상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니 나는 구룡폭을 절실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옥류동의 위쪽은 세존봉과 옥녀봉의 계곡이 합수하면서 불어나는데 그 두물머리에서 세존봉 쪽 계곡을 따로 구룡동이라고 부른다.

구룡동은 마치 엄지손가락처럼 길게 뻗은 막다른 골짜기다.

그 끝은 삼면이 모두 1백m가 넘는 벼랑으로 막혔으며 절벽 한쪽에 말안장 모양의 잘루목에서 너비 4m, 길이 84m의 폭포수가 쏟아진다.

이것이 개성 박연폭포.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손꼽히는 구룡폭이다.

그렇게 내리쏟는 물 힘이 얼마나 강하던지 물받이 바위에 홈으로 파인 구룡연의 깊이가 무려 13m나 된단다.

구룡폭 맞은 편에는 구룡각이라는 관폭정이 있어 탐승객들은 우선 여기에 올라 폭포를 건너다보게 마련인데, 1백m도 더 떨어진 거리건만 흩뿌리는 포말 파편에 금세 옷이 젖고,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물찧는 굉음에 바로 곁에서 하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폭포머리 위로는 묏산자를 겹쳐 쓴 모양의 구정봉 뾰족 봉우리들이 원경 (遠景) 의 잔산 (殘山) 인양 아련하게 비추고 있어 구룡폭은 더욱 그윽한 영원의 폭포수로 된다.

폭포 곁으로는 구한말의 서화가인 해강 (海崗) 김규진 (金圭鎭) 이 1919년에 새긴 미륵불 (彌勒佛) 이라는 대자 (大字)가 구룡폭의 기세에 맞서 꿋꿋하면서도 방정한 필체로 새겨 있다.

그 글자의 크기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불 (佛) 자 마지막 획을 길게 뻗어내린 길이만 13m로 이는 구룡연의 깊이를 반영한 것이다.

구룡연으로 떨어진 폭포수는 일단 못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기세차게 솟구쳐 경사진 너럭바위에 크게 호를 그리며 흘러내리며 그 물줄기가 미치지 않는 여백엔 최치원 (崔致遠).송시열 (宋時烈) 을 비롯한 명인들의 명시가 새겨 있다고 했다.

나는 고은선생과 함께 그 글씨들을 보러 관폭정 아래로 내려갔다.

쇠줄을 잡고 돌계단을 살살 밟으며 조심조심 가는데 갑자기 사방 막힌 골에서 우박같은 물방울이 사정없이 내리치니 간담이 서늘해지고 오금이 저려온다.

글씨 구경은커녕 쇠난간에 기대서서 간신히 사진 한 장 찍고 서둘러 올라오니 그새 비안개가 골안에 가득해 구룡폭은 보이지 않고 폭포수 소리만 고막을 울린다.

관폭정은 더 이상 관폭정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만 상팔담 (上八潭) 으로 가고자 했다.

상팔담은 금강산 탐승의 절정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 '나무꾼과 선녀' 의 고향이다.

구룡폭에서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까지는 7백m, 쇠사다리 14개에 3백70계단을 올라야 한다.

안내원은 비안개로 아무 것도 못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모두들 무조건 오르고 보겠다고 나섰다.

순간 나는 영리한 척 계산해 보았다.

못볼지도 모를 바에야 옥류동 바위마다 새겨 있는 이름 중 혹 화가도 있는가 찾아보는 게 유리할 것 같았다.

나는 과감히 상팔담은 포기하고 먼저 옥류동으로 내려왔다.

옥류동 계곡의 바위란 바위에는 빈틈없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숫자가 수백인지 수천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토록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 우리의 민족성인지 그것도 가늠키 어렵다.

분명한 것은 시대를 오를수록 글자에 품위가 있고, 근대로 내려올수록 낙서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옛 사람이 쓴 것은 문화유적이고 현대인이 쓴 것은 자연파괴였다.

나의 글씨 탐색은 헛되지 않았다.

산신령이 도왔는가, 아니면 귀찮아서 알려주고 말았는가.

앙지대 비스듬한 바위에서 단원의 아들인 긍원 (肯園) 김양기 (金良驥) 의 아호 두자와 단원의 충직한 추종자로 1991년 뉴욕 소더비 경매전에 그의 '풍악도권 (楓嶽圖卷)' 58폭이 출품된 바 있는 김하종 (金夏鍾) 이름 석자를 발견했다.

그 기쁨, 그 만족, 그 행복감이란…. 나는 이것을 자랑하고파 그 자리에 길게 누워 일행을 기다렸다.

앙지대에서 올려다보는 채하봉 바위들은 보면 볼수록 단원 그림의 벼랑 모습과 닮았다.

아마도 단원은 저 모습을 정확히 담아내려는 끊임없는 장인 (匠人) 적 수련과정 속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한 것이겠지. 아문, 그렇고 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윽고 일행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들뜬 기분으로 흥얼거리며 비안개 속에서 30분 기다려 7분간 나타나는 상팔담의 비경을 보았다며 나를 놀린다.

들을수록 부럽고 들을수록 억울한데 고은선생이 누가 들어도 편애하는 억양으로 나를 희롱한다.

"어허! 노형 (老兄) 께선 상팔담의 비밀을 아는가?" "그건 또 뭔데요?" "뭐긴. 유홍준은 상팔담을 못봤다는 거지, 어허허. " 이후 상팔담은 나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별로 기죽는 일 없는 나를 기죽이고 싶을 때면 모두 상팔담의 비밀을 꺼내곤 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다음회는 '삼일포 (三日浦)'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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