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7.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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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태호의 태도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봉환이가 주문진에 남기로 합의가 이루어진 뒤부터였다.

방파제에선 구린 입도 떼지 않았던 그는 철규와 숙소로 가지 않고 봉환이를 따라 선착장의 포장마차 안으로 찾아들었다.

하루 걸러 내린 폭우로 조업이 중단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장마차도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며칠째 어항 속에 담겨 있었던 오징어회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형, 정말 안 갈 거야?" "니도 생각을 해보거라. 내가 일행을 따라갈 형편이 되겠나? 내 오지랖이 열두 폭이라 카드라도 여기서 저질러 놓은 일들이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 듯한데 그것도 수습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내 잘났다고 객지로 떠나겠노?" "형 말에는 어폐가 있어. 형은 경상도 쪽이 고향이고 강원도가 객지인 셈이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고향.객지가 따로 있나? 살 붙이고 사는 곳이 고향이제. 원고향이라고 찾아간다 카더라도 낯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더 많아서 낯설기는 매일반인 기라. 살던 집이 그대로 있기나 하나. 동네 앞에 있던 느티나무가 있나. 난데 놈들이 들어와서 터 좋은 곳만 골라서 빌라 짓고 군의원도 독차지하고 떵떵거리고 사는 게 고향이라 카는 곳인데, 그런 고향을 빤다고 찾아가겠나?"

"둘이만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형하고 나는 사실 태어난 고향이 어딘지 잘 모르잖아. "

"내가 아까 모라카드노? 그러니까 살 붙이고 사는 곳이 고향이라 안카드나. 그것도 그렇지만, 니한테만 까놓고 이바구하지만, 묵호댁하고 승희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돌고 있는데,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설렁설렁 한선생 따라서 그 쪽으로 가겠노?

한 파수가 지나면 보름이나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낀데, 그 동안 가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어. 그런 걱정이 있는 내가 안심하고 갈 수 있겠나? 게다가 가게는 승희 것이잖아. "

"형, 눙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형이 걱정스런 게 솔직하게 말해서 뭐냐구. 아직도 승희씨를 단념하기 어려워? 아니면 묵호댁을 따돌릴 수 없어서 고민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승희씨 소유인 가게를 빌려서라도 묵호댁과 장사를 계속하고 싶은 거야? 나한테까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투명하게 토설해. "

"나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그런데 대가리 속이 뭐가 실타래 엉키듯 해서 교통정리가 안되는 판국인데, 솔직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있어야제. "

"형이 안가면 나도 두 선배를 따라가진 않을 거야. 형이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해도 여기 남아서 형과 둘이서 동업할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어. 형이 훌쩍 떠날 수 없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형이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는 까닭은 승희씨에 대한 입장 정리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러나 어렵더라도 깨끗이 단념해. 승희씨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형을 떠났어. 폭력이라는 수단으로써도 되돌려놓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 승희씨가 돌아서게 된 것은 물론 형이 자초한 것이니까 형 스스로 매듭을 풀어줘야 해. 형이 떠나지 않는다고 승희씨도 남을 것 같아? 천만에 그렇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잘된 일로 알고 일행을 따라나설 거야. 형이 승희씨에 대한 미련만 깨끗이 버린다면, 다른 어려움은 없어.

내가 승희씨에게 말해서 가게를 묵호댁에게 전세 놓으라고 권유해볼 거야. 그렇게 되면 항상 승희씨와 동행으로 고락을 같이한다는 부담이 남겠지만, 형이 심정 정리를 아금받게 가진다면 별 문제될 게 없을 거야. 소 닭 보듯한다는 속담도 있잖아. 그렇게 해서 형이 용대리 덕장으로 드나드는 길에 주문진에 와서 묵호댁을 만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야. 그렇게 해. "

봉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만 멀뚱하게 뜨고 앉아 있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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