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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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숙소로 돌아갔으나 승희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송은주의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될 것은 없었지만, 그때가 벌써 새벽 1시를 넘긴 시각이었기 때문에 태호는 잠이 오지 않았다.

봉환의 무관심도 예사롭지 않았다.일행이 함께 치러내야 할 장사일에는 서로가 스스럼없이 상종을 하였지만, 승희의 개인적인 문제는 서로 합의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애써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 태도가 역력했다.

묵호댁이 가게에 나타남으로써 빚어졌던 갈등의 정체들이 아직 여과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은 태호도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간극이 오래 갈 것 같은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변씨조차 덤덤하게 바라보려 하는 그 일에 태호가 그토록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모든 갈등의 단초들을 자신이 제공하고 말았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앙금이 너무나 미묘했기 때문에 무작정 뛰어들어 중재하기도 거북했다.

두 사람이 겨끔내기로 코를 곯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슬그머니 일어나며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를 넘고 있었다.

민박집 좁은 뜰을 벗어나 해변으로 나섰다.

모랫벌을 따라 띄엄띄엄 켜진 가로등 불빛들이 텅빈 밤바다를 공허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나는 행운을 기다린 것은 사실이었다.

앵벌이 조직을 탈출하여 떠돌기 시작했던 그날부터 태호는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외돌토리가 너무 을씨년스럽고 외로웠다.

어디에든 소속되고 싶었다.

소속될 수만 있다면 군대라도 다시 가고 싶을 정도였다.

소속될 수 있다면, 소록도로 가는 것도 사양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무소속의 허무 때문에 그토록 고통받을 줄 알았더라면 앵벌이 소굴에서 뛰쳐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그의 장타령은 고객들을 유인하는 상술이 아니라,가슴에 뚫린 무력감의 구멍을 채우려는 발버둥이었던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철규가 그의 심정을 희미하게 읽고 있을 뿐이었다.

해변 서쪽 끝에 서 있는 가로등 아래에 이르렀을 때였다.

태호는 세 젊은이가 피워둔 모닥불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이 둘러앉은 가운데는 작은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젊은이는 불길이 사그라질 만하면 종이상자를 뜯은 불쏘시개 로 꺼져가는 불길을 살려내곤 하였다.

모두들 자신들의 배낭을 곁에 두고 있었다.

노숙하고 있는 학생들이 틀림없었다.

한 젊은이가 낮에 보았던 태호의 얼굴을 기억하고 모닥불을 쬘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 사람은 깨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고 노루잠을 자고 있었다.

살갗으로 써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노숙들하는가 봐요? 열적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자다가 눈을 뜬 젊은이였다.

우리 일행이 자는 방이 있는데 갈래요? 그러나 셋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곧 떠나야 되거든요. 떠나요? 어디로 떠난다는 겁니까? 여기서 기다렸다가 일출장면을 보고 곧장 일어나 서해로 떠날 거예요. 거기서 일몰장면을 보려구요. 잠은 거기서 잘 거예요. 가능할까? 동해에서 출발시간을 너무 서두르면 서해의 일몰시간이 오히려 길게 남아서 싱거워질 우려가 있어요. 해를 따라가려는 사람들. 가슴을 치는 의미심장함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심각하게 이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라면 또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대중없이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손에 무심코 들려 있던 반병 소주를 모닥불가에 내려놓고 태호는 일어섰다.

비취호텔의 불빛은 아직도 휘황하게 켜져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그 불빛을 한동안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때 호텔에서부터 해변으로 내려오는 해안도로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승희가 틀림없었고, 취한 걸음걸이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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