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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36. 마음의 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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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필자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는 둘째 아들 상식.

나는 자식들에겐 운동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상식이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더니 "죽어도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는 결국 배재중에서 농구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아내는 내가 직접 자식을 가르쳤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자칫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혼동할까봐 모른 척 했다. 더욱이 농구협회 부회장이었던 나는 아들의 경기를 보러가는 것조차 삼갔다. 승부에 조그만 영향이라도 줘서는 안 된다는 결벽증 때문이었다. 상식을 대표팀에 넣겠다는 협회 임원들의 주장도 막았다. 공연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상식은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역차별을 당한 셈이었다. 고려대.기업은행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뒤따른 것도 나 때문이었다.

상식은 상무에 입대해서야 비로소 날개를 활짝 폈다.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선 MVP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리그에서 더욱 열심히 뛰었다. SBS에서 선수와 플레잉 코치를 거쳐 지난해 코치 연수를 위해 미국을 다녀왔다. 나는 '상식의 플레이가 내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종종 그의 플레이나 전술을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상식은 '아버지의 말씀은 흑백시대 얘기고 지금은 컬러시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무튼 상식은 아버지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

김상하 전 농구협회장(삼양사 회장)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대기업가의 아들인 김 회장은 경복중에서 농구를 시작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니면서도 선수로 활약했다. 그에게서 본받을 점이 많았다. 그는 선배들에게 예의를 갖췄으며 희생정신이 강했다. 농구협회 이사회에서 의견이 분분한 안건이 있으면 그는 밤늦게까지 회의를 주재하며 원만한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하기보다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이러다 보니 회의가 10시간 넘게 계속될 때도 있었다. 그는 의리를 중시했다. 농구대잔치가 대성공을 거두자 MBC.SBS에서 중계권을 달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는 첫 대회를 중계해준 KBS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를 인생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김 회장 재임 중 남자농구가 아시아 정상을 한 번도 밟지 못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야! 이놈들아. 날 어떻게 보좌하기에 우승 한번 못하는 거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호통을 치곤 했다. 죄책감을 느껴온 나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맨 먼저 김 회장을 떠올렸다.

윤덕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고문은 여걸이었다. 숙명여고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윤 고문은 여자농구 발전을 위해 헌신적이었다. 그는 1978년 농구협회 부회장을 맡아 20여년 봉사했다. 그는 큰손이었다. 국제대회가 열리는 곳엔 거의 빠짐없이 자비를 들여 달려가 선수들을 뒷바라지했다. 덕분에 여자농구는 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으며 아시아에서 중국과 쌍벽을 이루게 됐다. 윤 고문은 여걸답게 남자 선수나 지도자들과 어울려 자주 술을 마셨다. 남자들이 먼저 만취해 나가떨어지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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