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31.투어 적응하려 한국음식 외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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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회에 출전하다 보면 현지교포에게 식사초대를 받을 때가 많다.

지난번 캐나다에서 열린 뒤모리에클래식 대회에서도 그랬고, 이번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도 한 여자 교민이 우리 일행을 초청해 푸짐한 한국음식을 대접했다.

외국에 나가 살면 누구든 한국사람과 한국음식이 그리워 처음 본 사람끼리도 금세 이웃사촌이 된다.

교포들도 반갑고 나도 반가워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한 초대에는 거의 응하는 편이다.

지금은 한국음식을 마다하지 않지만 미국에 처음 와서 나는 한국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이 결심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각오를 새롭게 해야 했다.

언젠가 나는 우리팀 (세리팀)에 공언을 했다.

"전 여행자처럼 이곳저곳을 옮겨다녀야 하는 프로예요. 음식에 신경쓰다 보면 컨디션 조절이 안됩니다. 한국음식이 싫어서가 아니라 한국음식을 찾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안먹는 것입니다. "

엄마는 미국 올랜도에 오실 때마다 한국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오셔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손도 안대고 아메리칸식 식사를 하면 엄마는 무척 서운해하는 얼굴이셨다.

그래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삼성관계자들) 이 맛있게 먹어치웠으니 헛고생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런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데는 창피스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열린 미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출전했는데 내가 한국음식을 먹고 싶어하는게 안쓰러웠던지 일행중 한 분이 호텔 방에서 나에게 밥을 해먹이다가 일행 모두가 쫓겨난 것이다.

얼마나 창피하고 한심했던지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먹보' 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리고기를 끼니마다 먹고 싶지만 레드베터 코치가 내 식단에 대해 충고한 게 있어 자제하고 있다.

레드베터 코치는 "너는 근육질이라 육류를 많이 먹으면 지금 세계정상에 오르더라도 그것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며 체질개선을 주문했다.

몸이 둔해지면 스윙도 둔해지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헬스 담당 코치는 아예 내가 먹는 것을 조목조목 감시하기 시작했다.

튀김종류는 안됨, 햄버거도 안됨, 달걀 노른자도 안됨. 소화가 잘되는 걸로 골라 먹고 야채는 듬뿍듬뿍.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절대 안됨. 음료는 생과일 주스로 - . 그중 가장 괴로운 것은 오후 6시 이후에는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후 6시 전에 식사를 마쳐야 한다.

날마다 이런 힘든 규칙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김치와 고추장 타령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듯 나는 한국음식을 극복하고 내 엄격한 식단에 익숙해져야 했다.

요즘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교포 집에 초대를 받는 경우도 많아 한국음식을 안먹는다는 말은 않고 있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한국음식에 꼭 매달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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