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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 희생된 ‘프랑스 왕세자 사기사건’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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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루이 샤를은 프랑스 대혁명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왕관도 써보지 못한 채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혁명과 전쟁은 그야말로 역사의 와중(渦中)이다. 사회가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 그만큼 어수선하며 불안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불안한 시기를 기회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로 돈을 버는 사람은 전쟁 중에 한 밑천 챙기며, 남들이 불황이라고 아우성 치는 경제 위기 때 한 몫 거머쥔다고 한다. 또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루이16세 왕세자 사기극도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탄생

자신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의 공주라고 ‘러시아 황녀사건’은 DNA 대조로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사건이 프랑스에서도 일어났다.

이미 감옥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왕세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그럴듯한 증거들을 대면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프랑스는 내 것”이라며 왕권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러다가 당사자가 죽자 그의 후손들은 다시 “프랑스 왕궁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라 나섰다. 좀 웃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베일 속에 가려져 있고, 그럴듯한 증거를 내놓는다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그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색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부르봉 왕가의 절대군주 루이 16세는 불과 2년 동안 왕좌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구체제에 반기를 든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사라진 유일한 군주로 기록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러시아 황녀사건’도 그렇고 자신을 프랑스 왕 루이 17세라고 주장한 ‘프랑스 왕세자 사기사건’도 그렇다. 그저 지나쳐버릴 정신이상자나 허풍쟁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고 그렇게 믿을만한 구석을 제공했다.

더구나 그들은 죽어 관에 들어가면서까지도 황녀였고 왕세자였다. 그들은 생명이 다 할 때까지도 일말의 양심이 없었다. 그들은 결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거짓으로 무장한 그들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모두 죽을 때까지도 거짓을 숨겨

재미있는 것은 두 사기사건 모두 러시아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급격하게 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롯됐다. 다시 말해서 허술한 혼란기 속에서 대박을 챙기려고 한 인간의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고대 비밀을 추적하는 DNA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필코 진실을 밝히고야 만다.

18세기 말, 절대왕정의 철권통치에 더 이상 희망을 잃어버린 국민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민중의 소리를 외면한 채 호화스러운 왕궁생활에 탐닉해 있었다.

그저 혁명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만은 아닌듯하다. 사치와 허용의 화신으로 일컫는 앙트와네트의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라는 이야기가 들리자 국민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물론 빵과 과자 이야기는 날조라고도 한다. 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공주였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와는 자주 전쟁을 일으킨 적국이었다.

하도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어느 집이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에서 죽은 가족이 적어도 한 명씩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마리를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루이 샤를의 어머니 마리 앙트와네트는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러나 과장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만들어 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리 앙투와네트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만한 사치 속에 빠져 빵과 과자를 구별 못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궁궐에 묻혀 흙이라곤 밟지 못했던 그녀에게 이해를 구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앙트와네트는 프랑스의 적국 오스트리아 출신이라서 프랑스 말도 못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마리의 약점을 이용해 혁명정부가 국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하는데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정략결혼으로 마치 조선시대 일본 여자가 조선의 왕비로 들어온 격이나 다를 바 없다.

어쨌든 왕실에 대한 적개심이 억압과 독재의 상징이자 악명 높은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불에 타오르면서 프랑스는 혁명의 불길 속에 타올랐다. 유럽 최대 권력을 자랑하던 절대왕정 브르봉 왕가권력은 고스란히 혁명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루이 16세, 361대 360표로 단두대에

1793년 1월 21일 프랑스의 절대 군주 국왕 루이 16세가 그 동안 지배해 왔던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16일 왕비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의 칼날에 목이 날라가면서 대혁명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로 인해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의 상징인 왕과 왕비가 한때 자신들의 신민(臣民)이던 프랑스 국민의 눈앞에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감격과 비탄, 혼란과 흥분의 와중에서 프랑스 왕정은 막을 내렸다.

그의 죽음은 국민의회 재판에서 찬성 361표 반대 360표로 단 한 표 차이로 결정됐다. 루이16세의 죽음을 결정짓는 데에는 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혁명의 와중에서 살아남아 이득을 보려는 욕심으로 추파를 던지기 위해 혁명주의자들 편에 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혁명정부가 들어섰지만 프랑스 왕정을 따르는 왕당파들은 소수 건재해 있었다. 비록 루이 16세가 처형됐지만 그를 이을 여덟 살 난 왕세자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프로방스 백작을 포함한 왕당파들은 이 왕자를 프랑스의 새로운 왕 루이 17세로 추대했다.

왕관도 써보지 못하고 왕이 된 비운의 왕세자

영국, 러시아, 미국도 그를 왕으로 공식 인정했다. 물론 이름뿐인 왕이었다. 말이 왕이지 당시 루이 17세, 다시 말해서 루이 샤를(Louis-Charles)은 부모를 잃고 지하 감옥에 갇혀 공포에 떨고 있던 철모르는 어린 소년 죄수에 불과했다.

1795년 루이 샤를은 중병에 걸려 움직이지를 못했다. 의사가 방문했지만 늦은 뒤였다. 그 해 6월 8일, 왕관도 써보지 못했다. 이름뿐인 프랑스 국왕 루이 17세는 10살의 나이로 정치적 혁명의 희생물로 세상을 등졌다.

누구도 찾지 않았고,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창문조차 없는 독방에 갇혀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만 했던 비운의 왕자는 감옥에 갇힌 지 2년 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결핵. 그러나 독살됐다는 소문도 많았다.

바로 이처럼 확실하지 않은 진실과 소문 속에서 바로 비운에 세상을 떠난 루이 17세 왕세자 사기극이 발생할 수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서 결국 발생한 아나스타샤 공주 미스터리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