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일본 암환자들 ‘마지막 희망’ 찾아 한국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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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22면

일본인 구로키 도시유키(黑木俊之·49·회사원)는 지난 5월 초 난생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임파선까지 전이된 폐암 4기로 진단받은 지 1년반 만이다. 이미 수술 시기를 놓친 탓에 일본의 지바현 암센터에서 항암치료로 힘겹게 버텨오던 그에게 한국은 마지막 희망의 땅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진행 중인 다국적 임상시험에 참가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다. 도시유키처럼 폐암 환자 가운데 약 3%에 해당되는 특이한 유전형(EML4-ALK 돌연변이)의 비소세포폐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다국적 제약사 화이자가 개발 중인 PF-02341066이라는 경구약의 1단계 임상시험(1상)이었다.

국내 임상시험 시장 다국적 제약사들 신청 줄이어

“일본의 의사 선생님에게서 그런 약이 개발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미국에라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옆 한국에서도 같은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와 같은 종류의 폐암에 걸린 일본 환자 몇 명도 벌써 여기서 좋은 결과를 얻었더라고요.”

서울대병원에서 폐암치료제의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인 구로키 도시유키. 신동연 기자

1일 서울대병원 암센터 3층에서 만난 도시유키의 얼굴엔 희망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기검진을 위해 네 번째로 서울에 방문한 것이라고 했다. “이걸 보세요”하며 그는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산 모양의 꺾은선 그래프가 5월 20일자를 정점으로 가파른 하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암세포 수치를 보여주는 혈액검사 결과라고 했다. 그런 도시유키를 보며 통역 자원봉사자인 박공우씨는 “얼마 전 일본에서 찍어본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 결과에서도 종양이 작아졌고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던 증상도 없어졌다며 매우 좋아하고 있다”고 부연설명을 해줬다.

다른 일본인 환자의 안내도 맡고 있다는 박씨는 “우리나라 환자들처럼 일본인들도 ‘결과가 혹시 나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동의서에 사인을 한 뒤에야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다”며 “다행히 삶을 거의 포기했던 환자들이 모두 좋은 결과를 얻고 있어 통역하는 입장에서도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다국적 임상시험의 한국 측 책임자인 서울대 병원 암센터의 방영주 교수는 “미국과 호주 등에서 진행된 1차 1상 시험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며 “그 소식을 듣고 일본뿐 아니라 중국 의사들로부터 임상시험에 관해 문의하는 e-메일들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최근 한국에서의 항암제 임상시험을 늘리고 있다. 이는 기존 항암제로 치료에 실패한 암환자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무료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물론 위험부담도 크다. 대개 더 이상 시도해 볼 치료법이 마땅치 않은 환자를 대상으로 할 때가 많아 항상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나쁜 결과가 나오면 직접적인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의료진엔 환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의식이, 환자에겐 의료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다면 임상시험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2005년 5월 서울대병원에서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김인경(가명·59·여)씨는 그동안 두 번의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폐암 4기로 진단받은 환자의 평균 기대 여명은 1년~1년6개월. 그러나 진단을 받은 지 4년여가 지난 지난달 19일, 김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종로의 한 지하상가에서 여전히 밝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저 의사 선생님을 믿었어요. 치료법을 권하시는 대로 믿고 따랐죠.”
첫 임상시험은 폐암 진단을 받자마자 탁솔이라는 다국적 제약사의 항암제를 쓰는 대신 제넥솔-PM이란 국산 개량신약을 써보는 것이었다. 김씨의 담당의인 서울대병원 암센터의 김동완 교수는 “기존 치료제와 효능이 거의 같은 개량신약이었기 때문에 말이 임상시험이지 표준치료를 받은 것과 같았다”며 “임상시험 요건에도 딱 맞아 적극 권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반대했던 남편도 김씨의 믿음에 결국 동의해 줬다.

덕분에 총 6회에 걸친 항암치료와 관련 검사 등 일체의 진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그 뒤엔 폐암 표적치료제인 이레사를 먹으며 2년을 버텼다. 1996년에 처음 개발된 이레사는 사실 2000년대 초까지 미국과 유럽 등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에서는 기존 약에 비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동양권 임상시험에서 말기 폐암 환자들에게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서양인보다 동양인의 폐암세포 유전자에 더 많이 나타나는 돌연변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이레사는 비흡연 여성, 특히 폐암세포에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에게 주로 사용됐다. 그 결과 동양인 폐암 환자들의 생존 기간을 6개월 가까이 늘렸다는 분석도 있다. 김씨도 그 수혜자였다.

그런데 복용 기간이 길어지면서 김씨는 이레사에 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이번엔 다국적 제약사가 이레사 내성 환자를 위해 개발 중인 신약의 임상시험(3상)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지난해 8월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항암제는 부작용이 대단했다. 설사와 머리의 염증 등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도 올 5월까지 암세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 6월 검사에서 또다시 상태가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일단 약 복용을 중단하고 몸을 추스르는 중이다. 김씨는 “의사 선생님을 믿고 따른 결과 지금까지 잘 버텨왔고 치료비 부담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혈액암 환자인 최종섭(55)씨는 그러한 희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직접 체험해 왔다. 2000년 만성골수성백혈병(CML) 진단을 받고 한때 1~2개월밖에 살기 어렵겠다는 얘기까지 들었던 그다. 그러나 2001년 CML 표적 치료제인 글리벡이 우리나라에 처음 무상공급 형태로 들어왔을 때 대상 환자에 ‘당첨’돼 삶의 불씨를 살렸다. 그는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도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최씨는 “예전엔 나와 같은 백혈병으로 함께 투병하던 환자들을 한 달에 20여 명이나 저세상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며 “그런데 요즘엔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년에 20여 명 정도”라고 말했다. 글리벡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도 생겼지만 다행히 곧 거기에 맞는 제2, 제3의 약들이 개발되더라는 것이다. 특히 그 약들의 임상시험이 국내에서도 이뤄지게 된 사실이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최씨는 “백혈병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김동욱(가톨릭대 의대) 교수 같은 분들의 노력 덕분”이라며 “약값 부담 없이 빨리 치료받을 기회가 는 셈이지만 많은 암환자가 아직도 ‘임상시험’ 하면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상태’라는 선고처럼 듣고 상처를 입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의사가 임상시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며 “대부분의 환자는 의사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환자들의 심정을 좀 더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 세계 임상시험의 정보는 미국의 공식사이트(clinicaltrials.gov)를 통해 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식약청도 현재의 ‘임상정보방’ 사이트(clinicaltrials.kfda.go.kr)를 업그레이드해 보다 충실한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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