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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일본경제가 주는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90년대 초 버블이 꺼진 이후 일본경제는 금년에도 장기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91년 이후 지금까지 11만개의 중소기업체가 쓰러졌고 내년에는 2만5천개 기업이 도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근착 주간지 뉴스위크는 이러한 일본경제의 시련을 '잃어버린 10년' 으로 비유하고 있다.

일부 낙관론자들은 일본의 장인정신.기술력으로 무장된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2천2백4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들어 일본경제의 저력을 신봉하고 있지만 갈수록 비관론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시각도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며 앞으로 대개혁이 없는한 일본경제는 장기적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일본위기론이 제기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일본경제에 대해서는 소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피로라는 진단이 내려지면서 개혁작업의 필요성이 거론돼 왔으나 그동안 지지부진해 왔다.

현재 일본의 위기는 관료주의와 정경 (政經) 유착의 부패구조,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지연, 글로벌 스탠더드의 외면, 그리고 경직된 행정조직으로 인한 유연한 정책대응의 실패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버블붕괴는 일본경제의 급격한 침체를 가져왔고 또 약 77조엔에 이르는 부실채권은 경제전반에 걸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이에 대응해 행정개혁 및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시행해야 했으나 일본 대장성은 기존 금융시스템의 온존 (溫存)에 급급하면서 금리인하라는 미봉책으로 안이하게 대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안이한 대응이 아시아 국가들에까지 간접적으로 그 피해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작금에는 재정구조개혁에 집착한 나머지 증세 (增稅) 와 함께 공공요금 인상을 강행하는 등 경기부양에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경기침체를 더욱 악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지난 4월 뒤늦게나마 16조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실시하긴 했지만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80년대 버블경제를 만들어낸 주역인 일본의 엘리트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일본대국이라는 우월주의에 젖어 누구도 당면한 일본의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크루트 오직 (汚職) 사건 등이 보여준 일본의 정경유착과 부패고리는 중국의 청조말기 관료제 통치의 부패상과 흡사하다고까지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개혁을 외쳐온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도 결국 관료기구의 타성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해 참의원선거에서 대패로 이어지게 됐다.

이제 일본병의 치유라는 큰 숙제가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새 총리에게 넘어가게 됐다.

우선 발등의 불인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추가감세조치 등 경기부양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파벌정치구도에 길들여진 오부치 총리가 개혁과 경기부양을 양립시키면서 산적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경유착형 관료기구로 시종일관해 온 일본의 경험은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아시아국가들이 그동안 경제운용면에서 알게 모르게 일본모델을 원용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정도 차이는 있으나 타성에 젖어 있어 중재가 어려운 관료기구, 시장원리에 대한 신임이 희박한 관료들, 그리고 관 (官) 의존체질로 굳어진 기업들의 속성은 일본이나 우리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결국 이 점이 오늘날 우리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게 된 원인의 상당부분을 제공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이나 한국에 다같이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우리쪽이 개혁의 속도와 범위면에서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일본과 비교해 개혁을 향한 민의를 결집시키는 강력한 리더십이 우리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행정개혁과 경제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한다면 적어도 제도적인 면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 기득권세력이 자기의 이익에만 얽매이지 않는 고통분담과 함께 면밀한 궤도수정이 수반돼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개혁의 성공을 기하고 나아가 우리 경제의 장기 안정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관건이라 하겠다.

이선(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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