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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과거 이데올로기에 매달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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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치학 전공인 필자는 대학에서 자주 민주주의론을 강의한다. 한 학기 동안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론 강의에서 필자는 대학생으로서 필요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이 같은 강의에서 필자가 항상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만 정작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이름으로 정작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닌, 민주주의의 한국적 왜곡 형태인 반공주의인 경우가 대다수다.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정치인들이나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말을 해서 그렇지만, 정치인들이 과연 민주주의에 관한 몇 권의 책이라도 읽어보았는지, 사법고시를 통과한 법조인들이 과연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적이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민주주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 상당 부분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의적인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것들이다.

최근 한나라당 대표로 다시 선출된 박근혜 대표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정면으로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보도다.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것"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하고 나라를 부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발언 등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언급들은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민주화운동 인정,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에 대한 불만,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시도 등에 대한 정치적 대응에서 나온 발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 대응이라 할지라도 한 정당의 젊은 대표로서 이 같은 구시대적 발언은 곤란하다. 사실 '국가 정체성''대한민국 정통성' 등의 용어는 권위주의시대 독재의 억압을 정당화했던 용어들이며, 국가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용어들이다. 내용상 이런 용어들은 국가주의적 반공주의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민주적 질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던 과거의 이데올로기다. 물론 박 대표는 그동안 유지돼 왔던 제한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그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만과 비판에서 그러한 언급을 했겠지만, 그 용어나 방식은 과거의 구시대적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직후 반공국가 형성기에 위로부터 부과됐던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반공주의였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독재와 결합됐던 반공주의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독점적인 정체성이라 할 수 없다. 아직도 서구의 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비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의 민주화 노력에 의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정 수준에 이르렀다. 이 민주주의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이 민주주의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전에 따라 그 깊이와 외연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에 야기된 일련의 논란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불가피한 진통들이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보다 잘 보장되고 북한과의 평화적 관계가 보다 강화될 때 우리 내부의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해치는 국가보안법은 이제 발전하는 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굳이 언급해야 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국가주의적 반공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전자가 국가나 체제가 부과하는 위로부터의 왜곡된 민주주의라 한다면, 후자는 국가보다 국민을 앞세운 진정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