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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여우와 고슴도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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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단 1명이라도 부하를 둔 상사라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반문해보길 권한다. ‘난 지금 상사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이나 될까?’ ‘잘 못하고 있다면 원인은 뭘까?’

아마 이들 질문에, ‘네’, ‘100점’, ‘내가 원인은 아님’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시 있다면, 환자’ 되시겠다. 사내외에서 관리자 과정도 열심히 듣고 직무 교육도 잘 받아서, 관리자로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정작 상사가 되고 나면, 에고! 예상과 달리 부하들과 관계에서 애로를 겪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아니,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아래 것들이 모두 미쳐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집단으로 미쳤을 확률보다는 내가 미쳤을 확률이 더 높다는 건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겠지? 그렇다. 그들을 미친 집단으로 몰고가봐야 돌아오는 것은 ‘네가 미쳤다’는 말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K국장은 나름 부하직원들에게 잘 해준다고 생각하고 사는 ‘보통 상사’다. 항명을 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간 그 직원에게도 잘 해준 기억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직원이 지시를 씹기 시작하더니, 점차 냉소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얘가 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국장님은 절 무시하세요!’ ‘아니~어허!~엄~ 내가?’ ‘네!’ 그래서, 돌이켜 생각을 해봤다. 정말 무시했는지. ‘그래, 내가 가끔 모르는 척한 건 사실이지. 넌 가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자고 하잖아? 맥락에 안 닿는 말을 하기도 하고. 그럴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니?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 상처가 될 테고.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간 거야!’

생각을 해보니, 무시했다는 건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랬다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 ‘너 나하고 일하고 싶지 않지? 좋아, 네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께!!!’ 그렇게 정리하고 말았다.

정리를 한 직후만 해도 기분이 썩 나쁘질 않았다. 오히려 골치 아픈 직원을 ‘보내버린’ 홀가분함이 더 강했다. 그런데 옛 직장동료를 만난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진실에 직면해야 했다. 지난번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H의 말이다. ‘나 옛날에 너 때문에 상처 많이 받았다.’

이건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말임니! ‘뭐야~ 내가 더 상처받았거든!’ 맞다. 그때 분명히 K국장은 H로 말미암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다. H가 너무 여우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윗사람에게 눈웃음치며 살살대는 그녀는 보기만 해도 어찌나 역겹던지. 그런데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이어지는 H의 말을 들어보자. ‘너 그때 나 왕따 시켰잖니?’ 와아앙따! ‘네가 너무 여우 짓하니까 딴 애들이 피한거지, 왜 내가 널 왕따 시켰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H가 미워서 무시한 건 사실이었다!

H의 말을 듣고 돌아온 날, K국장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을 무시한다며 떠나버린 부하의 일과 지난 일이 교차하면서 생각할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냉정하게 스스로에 관해 돌이켜본 결과,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내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냉소가 살짝 가미된 까칠한 말투! 아무리 잘난 사람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투철한 자아의식! 부딪혀 해결하기 보다는 입 꼭 다물고 넘어가는 냉정함! H가 여우라면, 난? 영락없는 ‘고슴도치’였다! 이런 자각이 든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자신감이라는 주술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번 자신감을 잃고 나니, 겉으론 태연한 척하면서도, 마음은 조급해져서, 은근히 걱정에 걱정. 오늘도 새로 들어온 직원과 관계 맺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K국장이 앓고 있는 병은 ‘상사부적응증상’이다. 내가 만든 신조어니까, 의학사전을 찾을 필요는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직장상사는 이 ‘상사부적응증상’을 앓고 있다. 아주 잘하고 있는 듯 보이는 상사들도 내심으로는 이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상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관한 성찰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이 되면, 조심을 하게 되고, 그러면 최소한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도처에 널려있는 ‘관계의 기술’을 적절히 배합하면, 물론 더 나은 관계로 갈 수도 있다.

좋다가도 싫어지는 것이 인관관계고, 특히 상사와 부하 사이에는 ‘신분의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영원히 풀어낼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건 사실이다. 또 ‘상사부적응증상’을 앓으면서도 세월이 지나가면 또 승진하고, 서로가 불편한 속에서 넘어가는 것이 일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사부적응징후’를 그냥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그러기에는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많은 상사들이 ‘차라리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아무래도 전 상사로서는 역량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이 말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H도 K국장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 요즘 국장이라며? 걱정 된다 얘! 사람 잡지 않게 잘 해라!’ 미친 X! 그러나 솔직히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 아닌가!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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