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업은 지배구조 재편 중] 2. 사회 공헌으로 상생 -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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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이 북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던 17세기부터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스톡홀름의 올드 하버.

그 한복판엔 스웨덴 최대의 재벌 발렌베리의 본사 사옥이 버티고 서 있다. 150년의 전통을 가진 발렌베리가는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를 통해 사브와 에릭손 등 스웨덴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기업이 스톡홀름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는다. 롤프 칼슨 스웨덴 IT대학 교수는 "인베스터AB의 대표는 칼 구스타프 국왕,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총재와 함께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3인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은 창업자부터 5대째 내려오는 동안 조용하되 적극적인 사회기여 활동을 해왔다. 발렌베리가는 노벨상의 중요한 후원자이자 스웨덴 최대의 대학.연구단체에 대한 기부자다. 창업자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후 후계자들은 모두 스웨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칼슨 교수는 "발렌베리가는 창업 세대부터 막대한 배당 수익을 기업의 연구.개발 재원으로 제공하는 등 사회적 의무를 중시했다"며 "이것이 가문의 지위와 기업 경영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말했다.

사실 발렌베리가의 인베스터AB가 갖고 있는 스웨덴 주요 기업의 지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브(20%)를 제외하면 에릭손(5%), 일렉트로룩스(6%), 스카니아(9%) 등 대부분 10% 미만이다. 그런데도 인베스터AB는 이들 기업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프레데릭 린드그렌 인베스터AB 부사장은 그 이유를 "대부분의 보유주식이 일반 주식보다 최고 1000배의 의결권을 갖는 특혜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베스터AB의 의결권은 에릭손 38%, 사브 36%, 일렉트로룩스 26%에 달한다. 주식의 의결권을 차등화하는 이 제도는 1930년대 외국기업들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에 대응해 스웨덴 정부가 만든 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프랑스의 황금주, 네덜란드의 신탁재단, 이탈리아.스페인의 계열사 간 상호출자 허용 등이 모두 강력한 경영권 보호장치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식 보호제도는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역외기업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유럽 내에서도 유럽식 기업 모델이 주주가치를 저해하고 투명성을 낮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EU)은 최근 주주권을 대폭 강화하고 자국기업 보호장치를 철폐하는 내용의 기업지배구조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번엔 유럽 국가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ING의 반 빙크 이사는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사회의 감독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좋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고유한 전통과 사회.문화적 여건을 존중해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S&P 500대 기업 중 유럽식 가족경영 모델을 따르고 있는 기업의 성장률이 23.4%인 데 반해 미국식 전문경영 기업은 10.8%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마르코 베흐트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는 "프랑스의 르노가 몇년 전 경영압박에 시달리자 생산성이 낮은 프랑스 내 공장 대신 생산성이 높은 벨기에 공장을 폐쇄했다"며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자본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해당 국가와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유럽의 기업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데는 사회 공헌과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통해 국내에서 확고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금융중심지 프랑크푸르트에는 국내외에 2000여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도이체방크가 있다. 이 은행의 로날드 바이커트 홍보국장은 "지분의 53%를 외국인 투자자들이 갖고 있지만 적대적 M&A를 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최고경영자(CEO) 등 주요 임원을 임명하고 감독하는 감독이사회의 절반 이상이 노조의 추천과 직원의 투표를 거쳐 선출되는 직원대표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M&A를 시도하려면 경영진뿐 아니라 사실상 전 임직원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는 구조다.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없는 상황에서 4%에 가까운 지분을 갖고 있는 임직원이 경영진의 가장 강력한 지원세력이다.

스톡홀름.프랑크푸르트.브뤼셀=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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