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번 다 찍어” “기렇게 보여주면 안 돼” 그녀들에겐 투표가 낯설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진출을 위한 인큐베이터로 불리는 하나원이 세워진지 10주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도 1만6000명을 넘어섰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하나원 내부를 중앙 SUNDAY가 들어가 봤다.영화 '크로싱'의 조감독으로,내년 초 감독 데뷔 기대에 부푼 김철용씨와, 제과제빵 학교의 교사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 교육생을 따뜻한 언니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는 김영미씨의 남한사회 정착기도 소개한다.다음은 중앙SUNDAY기사 전문.

“나는 1번, 2번, 3번 다 찍었다.” “야~! 종이 접어라. 기렇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하지 않나.”

2일 경기도 안성의 하나원에서 남한 사회 적응 교육을 받고 있는 탈북 여성들이 투표 체험을 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2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에 있는 북한이탈주민 교육시설 하나원. 노란 상의와 감색 운동복 바지 차림의 20~30대 여성들이 1층 강의실 옆에 설치된 모의 투표소에서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투표를 한다. 남한 주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의 하나다. 한 여성은 자신의 투표용지를 동료에게 보여 주며 깔깔대고 웃는다.

강의실 안에선 “찬성·반대 투표지가 따로 없는가” “당원이 되면 좋은 점이 뭔가” “투표 안 하면 벌을 받나” 등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같은 시각 아래층 유아방에는 18개월 된 소연이를 비롯해 20여 명의 아이가 붕붕차를 타며 엄마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래 한국 아이들보다 몸집은 많이 작았지만 표정은 다 밝았다.

하나원이 8일로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한국 사회는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온 사람들을 더 이상 ‘귀순자’로 부르지 않는다. 배고픔을 피해 넘어온 탈북자 수가 늘기 시작한 1997년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으로 용어를 지정했다. 정치적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도적 뉘앙스를 담은 용어다. 지원도 ‘탈북 영웅에 대한 포상’에서 ‘남한 사회 정착 지원’으로 바뀌었다. 99년 하나원이 설립된 배경이다.

2009년 6월 현재 남한으로 온 탈북자는 1만6513명. 지난해 2809명이 입국했다. 매년 10%씩 느는 추세다. 이대로 가면 내년 말엔 탈북자 2만 명 시대가 올 것이란 관측이다. 현재 안성의 하나원 본원과 양주 분원에서 교육 중인 탈북자는 612명. 매달 160~190명이 한 기수가 돼 입소하고, 3개월 과정을 마치면 퇴소한다. 중국과 라오스·태국· 몽골 등 제3국을 경유해 들어온 이들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등 관계기관의 합동 신문을 위해 4주를 보낸 뒤 하나원에 들어온다.

최근 입국한 탈북자의 특징은 여성이 75%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2002년 여성 입국자가 남성을 추월한 이래 계속돼 온 현상이다. 중국 등지에서 3~7년간 지내다 오는 이가 많고, 자의나 타의 혹은 인신매매에 걸려 중국인 또는 조선족과 결혼 생활을 하다 온 경우도 적지 않다. 전체의 61%를 차지하는 20~30대 여성은 사회적응력이 높다. 같은 북한이탈주민인 김영희 한국상업은행 수석연구원은 3일 국회 세미나에서 “탈북 여성들은 북한이 기아로 허덕이던 고난의 행군 시기, 가족을 위해 사선을 넘은 강한 정신력의 투사이자 온갖 고초로 정신적·육체적 상처가 심한 사람”이라며 “이들에게 맞춤형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이미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가 브로커를 통해 북한의 가족을 불러들이는 경우도 는다. 최근 입국자의 20% 정도가 ‘가족결합형 탈북’이다.

2일 방문한 안성 하나원에는 성인 남성들이 없었다. 노인과 청소년·여성을 제외한 성인 남성들은 양주분원에서 교육받기 때문이다. 하나원 관계자는 “탈북 남성들은 남존여비 사상과 같은 가부장적 생각이 심해 온 가족이 함께 있으면 여성이나 자녀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다”며 “이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성인 남성은 따로 교육받는다”고 했다. 같은 가족이라도 예외 없이 분리한다.

교육생들은 입소하면 12주(420시간) 동안 교육을 받는다. 쓰레기분리수거나 남한에서 많이 쓰는 영어 표현도 배우고 포장기술 같은 기초 직업훈련도 받는다.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 남한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검증시험 과정과 운전면허 특강은 인기 과목이다. 하나원에 머물면서 자격증과 면허를 딸 수도 있다. 최근엔 양성평등교육도 강화됐다.

소비 생활 교육도 중요한 파트다. 하나원 관계자는 “탈북자들은 내 것을 아낀다는 관념이 약해 돈을 한꺼번에 써 버리고 약도 한꺼번에 다 먹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초기 일시불로 지원된 정착금을 한번에 날리는 사례도 꽤 있었다.

최근 정부는 ‘스스로 도우려는 자들’을 위한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직업훈련 과정 입학, 자격증 취득 등 정착에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사람에겐 2140만원까지 격려금을 준다. 사회에 나온 뒤에도 정착을 돕는 ‘하나센터’를 전국 네 곳에 운영하고 있다.

하나원 설립 10년 만에 탈북자 출신 ‘한의사·박사·공무원’ 등 모범 사례도 나오지만 그늘도 짙다. 일반인의 70~80%에 지나지 않는 낮은 취업률과 청소년의 학교 부적응은 큰 문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탈북자 청소년이 22.6%다. 목숨을 건 탈출 경험과 힘겨웠던 제3국에서의 삶 때문에 닫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경향도 있다. 일확천금의 꾐에 넘어갔다 망하는 일도 적잖다. 남한에 정착했다가 브로커의 꾐에 빠져 영국으로 재망명을 시도했다 다시 돌아온 탈북자도 70명이다.

하나원은 세계사에서 유일한 기관이다. 다른 탈출한 주민을 정부가 종합 관리하기 위해 세운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서독도 동독 탈출 주민을 수용소로 모았다가 각 지방으로 보내 사회보장 시스템에 맡겼다.

김수정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