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6.앤디 워홀,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찍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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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64년 어느 날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 (1928~87) 은 동료 조나스 메카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이 앤디, 자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한번 촬영해 보지 않겠나? 자네가 찍으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것 같애. " 워홀보다 여섯살 위인 메카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당시 뉴욕에서 '필름 컬처' 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55년 창간 때부터 편집장을 지낸 그는 감독으로도 활동하면서 아방가르드 및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제 우체국 가는 길에 우연히 그 빌딩을 올려다 보게 됐어. 그런데 자태가 너무 멋들어지지 않겠나. 자네가 작년에 만든 영화도 떠오르고해서 이렇게 권해보는 걸세. "

메카스가 떠올렸다는 건 워홀의 63년 작품 '슬립 (sleep)' .벌거벗은 남자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6시간동안 계속 찍은 흑백영화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그냥 잠자는 모습만을 담았으니 관례적으로는 영화라고 부르기도 힘든 '영화' 였다.

64년 7월25일 밤 8시10분, 마침내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이라고 해야 별게 없었다.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필름만 갈아끼우는게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8시간짜리 영화 '엠파이어' 가 완성됐다.

이 필름이 일반에 처음 상영된 건 약 1년뒤인 65년 5월6일. 시티홀 시네마라는 아주 낡은 영화관에서였다.

관객은 2백명정도.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자 한 사람씩 슬슬 빠져나갔다.

그도 그럴것이 30분이 되도록 화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라며 끈덕지게 남은 관객이 50명. 1시간 후 갑자기 화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앰파이어 빌딩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건물 전체가 빛난 것이다.

거의 암흑과 같은 상태에서 불이 들어오니 그 효과가 대단했다.

관객들은 떠나갈 듯이 박수를 쳐댔다.

그러나 그 뿐, 나머지 시간은 또 그 상태로 지속되다 끝이 났다.

통조림 캔 모양이나 마릴린 몬로 등 유명인의 초상화를 죽 늘어놓고는 '예술' 이라고 주장했던 앤디 워홀. 그는 대량생산과 기술복제시대에 고전적 의미의 '예술' 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설파했다.

영화 '엠파이어' 는 황당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바로 '저자 (예술가) 의 죽음' 을 선고했던 그가 영화라는 매체에까지 자신의 주장을 확대한 경우다.

사실 그건 60년대 구미에 노도처럼 밀어닥쳤던 '대항문화' 의 분위기에 크게 빚지고 있기도 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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