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구조조정을 보는 해외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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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한국의 기업과 은행권의 구조조정이 요사이 본격화된 것 같다.

지난달에는 55개 퇴출기업의 명단이 발표됐고 5개 은행의 퇴출도 강행됐다.

또 지난주에는 정부와 여당이 기업 구조조정을 더욱 가속하기로 결정하고 5대 재벌그룹의 빅딜과 부실계열사 퇴출을 이달말까지 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의 구조조정이 말만 무성하고 행동이 없다고 불평해 오던 해외투자가들은 이러한 일련의 정부 처사를 칭찬하기보다는 아직도 기대 이하라고 실망하거나 그 처리과정에서 노출된 문제점들만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해외투자가들의 이러한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금융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시장경제가 확실하게 정착된 구미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기업의 구조조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기업들이 자신의 생존차원에서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

만약 어느 기업이 방만한 경영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고 부채비율 등 자산상황이 열악해지면 은행과 금융시장은 가차없이 자금줄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그 회사는 도태되고 만다.

이러한 냉혹한 시장경제의 작동에는 정부의 어느 실력자도 간섭할 수 없고 또 간섭하려는 엄두도 아예 내지 않는 게 통례가 돼 있다.

우리나라 같은 후진적 금융.기업구조 아래서는 로비 ( '뇌물' 의 한국적인 표현) 를 받은 정부의 실세나 유력한 정치인.고위관료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시장경제 운용을 흐려 놓았기 때문에 망해야 할 기업, 문 닫아야 할 은행들이 버젓이 연명해 왔다.

일본의 경우도 이 점에서는 우리와 비슷하다.

지금까지 금융기관을 감독해야 할 대장성과 중앙은행의 관리들이 피감독자인 은행이나 증권.보험회사들의 로비에 녹아나 감독절차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현장검증 날짜와 장소를 미리 귀띔해 주는 식으로 봐줬기 때문에 일본도 오늘의 금융부실을 자초했다.

일본은행들 스스로 만들어 낸 자료를 근거로 대장성이 발표한 총 부실여신은 6천억달러지만 서방전문가들은 실제 부실액수가 1조달러를 훨씬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부실여신이 1조달러라면 이는 일본 국내총생산 (GDP) 의 25%가 넘는 액수다.

금융감독 체계가 미개할수록 취약은행들은 자본비율을 악화시키는 불량여신을 줄이기 위해 당연히 청산해야 할 고객회사들을 연명시키며, 그 대신 새로운 여신으로 체납된 원리금을 대체해 우량여신인 양 시간을 끌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기업의 구조조정은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금융감독체계의 선진화로 은행들 스스로 부실기업에 대한 자금줄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청산절차를 밟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청산은 결손비용의 증가로 단기적으로는 은행의 자본비율을 압박하기 때문에 자기자본이 튼튼한 우량은행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때문에 정부는 무엇보다 우선 부실은행들을 정리하는 금융의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금융개혁이 실현되면 빅딜이니 퇴출기업 살생부니 하는 외압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해외투자가들이 우리나라 구조개혁이 느리다고 불평하는 것을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 정부가 절실한 금융개혁을 철저하고 신속하게 완성해 금융기관들의 여신관리 기능을 하루빨리 회복시켜 시장경제 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충고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알짜기업도 팔아 부채를 탕감하라' 는 정부의 강압적인 으름장을 악용해 우리나라 기업들을 헐값에 후려쳐 사 보겠다는 해외 독수리투자가들 (Vulture Fund Investors) 의 고도의 술책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우리나라 전체회사들의 총 주식값이 미국 코카콜라 음료회사 하나의 주식값의 4분의1도 안되는 현실에서, 우리 정부까지 가세해 해외 독수리투자가들에게 우리 기업들을 더 헐값으로 파이어 세일 (fire sale)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현 경제위기의 한 책임자로 지목받고 있는 대기업들을 처벌하는 차원에서 헐값에라도 외국투자가들에게 소위 '알짜 사업' 들을 팔아 치우게 하는 정부시책이 단기적으로는 국민의 인기를 끌는지 모르나 우리 경제의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자해행위임에 틀림없다.

정부는 은행 등의 구조조정을 통한 철저한 금융개혁과 선진적인 금융감독체계 구축에 우선 초점을 맞추고 기업의 구조조정은 시장경제의 순리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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