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에세이]일그러진 'IMF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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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주 워싱턴에 오랜 친구 한명이 이주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흘러들어왔다는 것이 옳다. 복잡한 개인사정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는 한국의 경제위기가 만든 '국제 유랑인' 중 한명이다.

규모는 작았지만 알차게 꾸려오던 사업이 갑자기 기울면서 식구들을 서울에 남겨놓고 혼자 떠나온 처지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찾아 몇군데를 거친 후 워싱턴으로 온 그가 언제 또 자리를 옮겨야 할지 알 수 없다.

얼마전엔 실리콘 밸리의 중심인 팰로 앨토에 출장갔다가 역시 오랜 친구 한명과 우연히 마주쳤다.

한국의 벤처기업협회가 샌호제이 지부를 내면서 열었던 세미나 자리에서였는데 "이게 얼마만이냐" 며 반갑게 악수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의 반이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후 거푸 닥쳐오는 자금난 속에 부도를 막으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보니 어느날 얼굴이 돌아가버리더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정부 지정 유망 중소기업인데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 전에도 크게 믿었던 바는 아니지만 정말 급해져 '유망 중소기업은 부도나지 않도록 하겠다' 는 정부 발표에 희망을 걸고 은행에 가면 되레 은행 사람들이 우리더러 미안하다며 사정을 하고…. 오랫동안 좋은 실적을 쌓으며 거래해온 은행이었는데도 자기들부터 급해지니 다 똑같더라구. "

팰로 앨토 세미나에 나타난 것도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방미 (訪美)에 맞춰 구성됐던 투자유치단중 한사람으로 선정됐을 만큼 그의 기업이 유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앞에선 소용이 없었고 결국 건강을 조심하라는 심각한 경고가 왔는데도 쉬기는커녕 빡빡한 일정의 해외출장길에 오른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반갑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즘엔 반가움은 잠깐이고 무거움이 오래 남는 해후가 더 잦다.

워싱턴=김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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