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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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변씨의 혀꼬부라진 말을 들으면서 성민주는 몰래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후덥지근했던 술청 안의 공기도 적당하게 식어 있었다.

냄비의 안주도 바닥이 났고, 안주인도 조리대의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시계를 훔쳐보았다.

그 눈치를 알아챈 사람은 태호였다. 그가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일어서면서 변씨를 곁부축하고 있었다. 횡설수설하고 있던 변씨는 군소리 없이 전신의 무게를 태호의 어깨에 내맡기듯 기대며 일어섰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으나 철규는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주는 힐끗 그를 일별했다.

그동안 사뭇 변씨로부터 질책을 당해왔던 철규는 무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시장골목 밖으로 멀어졌을 때, 명료한 목소리로 철규가 말했다.

"민주씨, 호텔까지 모셔드리죠. " "아니예요. 제가 숙소까지 모셔드리죠. " "나 취하지 않았어요. 취한 척했을 뿐이죠. " "거짓말. " 식대를 치르고 두 사람도 일어섰다.

그 사이에 질금거리던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로 별빛이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뒷좌석에 나란하게 자리잡은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의 따뜻한 손을 잡아본 것은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민주는 힐끗 철규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빗물에 젖은 도로를 달려가고 있는 택시 드라이버의 뒤통수에 꽂혀있었다.

취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태호나 변씨가 먼저 일어나서 숙소로 돌아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철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 쪽 어깨를 가볍게 철규에게 기대었다.

아무런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의 부드러운 육체가 그녀의 한 쪽 볼따구니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음습한 몸냄새는 낯설었다.

그러나 장바닥에서 맞은 빗물 때문일 것이었다.

육중했지만 부드러운 육체와 시큼하고 습기 밴 몸냄새 사이의 괴리감을 유추해볼 사이도 없이 택시는 어느새 호텔 현관 앞에서 정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철규보다 먼저 잽싸게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좌석에서 지금 막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철규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취한 사람 대접하고 있는 민주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철규는 곧장 민주의 깜찍한 속셈을 알아차렸다.

현관 앞에서의 작별을 차단하려는 술책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규는 민주의 곁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로비를 서성거리고 있던 웨이터가 달려와서 철규를 대신 부축하겠다고 나섰지만, 민주는 거절해버렸다.

도어를 열고 향수 냄새가 은은한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철규는 금방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여자의 냄새가 그를 갑자기 아득한 피곤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현관에서 그를 술 취한 사람 취급했던 민주의 태도는 객실에 들어와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철규의 한 쪽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목덜미에 걸쳤던 자세를 풀지 않은 채 그녀는 침대 위에다 조심스럽게 남자의 육체를 눕혔다.

그리고 곧장 철규로부터 물러났다.

옷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시 화장실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한 배설을 끝낸 그녀가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과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빠짐없이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철규의 촉수는 예민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응석받이처럼 침대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시각은 언제일까. 철규는 그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놀라운 행동과 마주쳤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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