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 요양소 지어달라” 호소만 남긴 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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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씨의 사연을 소개한 2005년 11월 9일자 본지 1면.

2005년 11월 박승일씨의 사연이 보도됐을 때 루게릭 병으로 고통받던 4명의 환자가 함께 소개됐다. “정부가 요양소를 지어 가족들의 짐을 덜어달라”고 호소했던 이들 가운데 2명은 세상을 떠났다.

보도 당시 한국ALS협회의 부회장이었던 김진자(68)씨의 남편은 2007년에 세상을 떴다. 투병을 시작한 지 14년 만이었다. 폐에 물이 차는 등의 합병증으로 그는 숨지기 전 7개월을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남편은 8000만원의 빚을 남겼다. 김씨는 병원비가 모자라 5개의 신용카드를 긁고도 사채 빚을 끌어다 썼다. 남편이 죽은 지 2년이 지났지만, 김씨는 아직도 선잠을 잔다고 했다. 가래가 기도를 막을까 계속 깨어 남편을 살피던 버릇 때문이다.

작곡가 정선근씨도 2006년 숨졌다. 마흔의 나이였다. 서울 염창동 반지하방에서 외롭게 살다 숨진 그의 사인은 질식사였다. 호흡 기관이 마비돼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는 인공호흡기를 사지 않았다. 그는 2002년 발병 후 부인과 이혼했다. 부모는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을 피해 도피하던 상황이어서 그를 간병할 수가 없었다. 숨지기 이틀 전까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협회 관계자는 “정부 보조 간병비(매달 30만원)로는 한 달에 150만원 정도 드는 간병인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과 나란히 누워 투병 생활을 하던 이정희(60)씨는 현재 소설을 쓰고 있다. 당시만 해도 혼자서 호흡할 수 있었던 그는 남편이 2006년 숨진 뒤 충격으로 상태가 악화됐다. 3개월 뒤 호흡 부진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뒤 그는 인공호흡기를 장착했다. 하지만 발병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환자들 사이에서 ‘행운아’라고 불린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그가 소설을 불러주면 간병인이 이를 받아쓴다. 이후 직장에서 돌아온 아들과 딸이 그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출력하면, 다시 읽어보고 고치는 식이다. 4년 전 ‘요양소가 필요하다’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던 그의 소망은 달라지지 않았다. “루게릭 환자들은 너무 특수해요. 일반 요양병원에선 살 수가 없어요.”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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